경남 창원시 마산에 있는 김주열의 동상. 힘들게 지켜낸 민주주의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사태를 명확하게 보는 시민이 체제를 지탱한다. ⓒ레나
업무차 마산에 갔다가 김주열 동상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들렀다. 1960년 마산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죽음은 2차 마산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를 흔히 ‘피로 쓰인 민주주의 역사’라고 한다. 가끔은 의문이 든다. 민주주의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쟁취하는가.
민주주의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다. 기원전 6세기쯤 아테네 시민들이 정치 참여를 요구했고,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를 거쳐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아테네 민주정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시민으로 분류된 이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제도였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나타난다. 그가 던진 질문은 간단했다.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치는 아무나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배와 같아 선장의 말을 듣지 않고 가장 시끄럽고 달콤한 말을 하는 자가 배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테네에는 ‘데마고그’라고 불리는 선동가가 있었다. 모든 시민이 민회에 참여했다고는 하나 일반 대중이 정치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데마고그는 그 지점을 노려 연설로 대중의 감정을 이용해 정치를 휘두르곤 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또한 이런 감정적 민주주의의 재판제도에 의해서였다.
정보 전달이 빠른 현대 사회에서는 지식 공유보다 감정 확산 속도에 따라 의견이 좌지우지되기 쉽다. 자유와 평등이 커질수록, 비판적 사고와 정보의 검증이 중요한 이유다.
유튜브 채널들이 대안매체로 자리 잡게 된 근본적 이유는 레거시 미디어의 타락이다. 편중된 보도와 권력 찬양이 레거시 미디어로 표출되면서 사람들은 유튜브를 대안으로 삼게 됐다. 그러나 매체 또한 인간이 다루는 것. 인간 또한 완벽하지 않기에 권력을 쥐게 되는 동시에 나와 적을 가르고, 필터 없이 생각을 내보내기 쉽다. 대부분의 인간은 권력 앞에 한없이 취약하다.
노엄 촘스키는 “현존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일반 대중은 사유·토론·결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조작의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레거시 미디어든, 유튜브 등 대안매체든 무조건적인 권력을 이양받은 순간, 자신에게 권력을 준 시민을 대중으로 만든다. 하나의 매체, 하나의 스피커를 우상시하는 일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다. 촘스키는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토론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숙의’의 주체가 될 것을 권한다. 매체를 쥔 자, 정치의 길에 선 자는 비판과 감시의 대상이지 아이돌이 아니다. 한 명의 정치가나 매체를 우상시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부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