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으로 사막화된 22세기, 물과 화석연료를 독점한 독재자 ‘임모탄’이 폐허 위에 군림하고 있다. 호위무사인 ‘퓨리오사’는 압제를 견디다 못해 임모탄을 배신하고 고향인 ‘그린랜드’를 향해 탈출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시작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생명이 약동하던 그곳도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푸르른 땅에서 농사를 짓던 ‘어머니들’은 이제 바이크 전사가 되었다. 결국 임모탄을 제거하고 세계를 해방시키기로 한 퓨리오사. 영화는 그가 독재자를 처단하고 ‘시타델’의 요새로 오르며 끝난다.
영화는 세계의 해방을 총알이 아닌 씨앗에서 본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퓨리오사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건 ‘어머니들’이 지켜낸 씨앗이었다. 씨앗이 품은 내일이란 생명이 다시 자랄 수 있는 땅과 그로부터 먹거리를 얻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이 공존하는 세계, 그 ‘오래된 미래’가 열어주는 자급과 자치의 삶이다.
10년이나 지난 영화를 떠올린 건 최근 읽은 한 칼럼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 긴급행동’의 뎡야핑 활동가는 이렇게 썼다. “2023년 12월, 팔레스타인 여성 농민운동가 하나디 무한나의 피란길은 다른 이들과 조금 달랐다. 이스라엘 점령군이 부순 ‘씨앗은행’의 폐허에서 밀, 보리, 시금치 등 팔레스타인 토종 씨앗을 먼저 구해내야 했다.”
하나디 무한나는 2019년 가자 최초의 씨앗은행을 설립했다. 멸종위기에 놓인 팔레스타인 토종 씨앗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농민에게 유전자가 조작된 외래 종자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식량 주권을 약화했다.
무한나 가족은 토종 씨앗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을 계속해왔다. 지역의 토착 씨앗들이 병충해에도 강하고 척박한 환경을 잘 견디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나는 이 프로젝트가 “종자 보존을 넘어, 팔레스타인 문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씨앗엔 풍요로운 문명에 대한 기억 역시 담겨 있다.
이스라엘은 이번 집단학살 과정에서 가자와 서안지구의 씨앗은행을 파괴했다. 팔레스타인의 ‘토종’을 살육하겠다는 의지는 비단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그건 팔레스타인인들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일구고 거두어 먹는 일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겠다는 절멸의 의지로 확장된다.
무한나 가족은 씨앗과 함께 탈출했다. ‘그린랜드’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피란지인 데이르알발라에서 새로운 협력 시스템을 만들었다. 무한나 가족이 종자, 노동력, 비료를 제공하고 땅 주인이 토지와 물을 대는 방식이다. 그들은 씨앗은행이 보관하던 다양한 작물을 다시 키워내는 걸 목표로 한다.
지금 가자에선 인명 학살을 넘어 생태 학살이 벌어진다. 이스라엘은 동물과 식물을 죽이고,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도록 생명의 터전을 완전히 부숴버리는 중이다. 온갖 화학무기들의 포화 속에서 가자의 땅도 함께 죽어간다.
트럼프는 그 빈사 상태의 땅에 리조트를 짓겠다고 떠든다. 미국과 이스라엘, 방산업체들과 에너지 기업들까지, 폭력과 파괴로부터 돈을 버는 자들은 가자에서 자신들의 수익 모델을 실현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서울 아덱스(ADEX) 무기 박람회에 전범국인 이스라엘과 이스라엘항공우주산업 등 전범기업들이 버젓이 참여했다. 한국 시민들은 이에 반대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시위를 조직했다.
씨앗 안에서 미래를 꿈꾼 ‘퓨리오사’는 더 이상 영화적 은유가 아니다. 그는 하나디 무한나로, 그리고 씨앗을 꼭 쥔 여러 개의 손으로 실존한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팔레스타인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살아갈 만한 행성 전체”(안드레아스 말름)일지도 모른다.
손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