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약 1주일 후 한국 경주에서 개최된다. 이 협의체는 1989년 호주에서 장관급으로 시작해 1993년 미국 회의를 기점으로 정상급 회의로 발돋움한 아시아·태평양 연안 지역의 최대 경제협의체다.
이번 회의가 특별히 의의를 지니는 것은 트럼프 2기가 시작된 이후 미·중 전략경쟁이 점차 격화되는 가운데 트럼프와 시진핑이 동시에 참석하는 첫 다자회의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이 회의를 통해 트럼프와 시진핑 사이의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트럼프는 이미 공공연하게 중국을 미국의 최대 위협으로 규정하고, 관세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고 굴복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2025년 중국에 대해 최대 155%까지 관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천명한 바 있고, 중국과의 교섭을 통해 집행을 세 차례 연기한 끝에 최근 다시 100% 관세 부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중국은 이러한 트럼프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지지기반에서 주로 생산하는 대두와 돼지고기의 수입국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전환해 트럼프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입혔다. 중국은 세계 공급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핵심 첨단산업 제품 생산에 필수 불가결한 희토류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통해 맞불을 놓았다. 마치 치킨게임을 하는 양상이다.
한·미관계 풀려야 대중 관계 회복
이번 회의에서 트럼프와 시진핑이 협상장에 마주 앉아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트럼프는 미·중 정상회담 철회 가능성도 내비치고, 중국이 양보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주제는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이다. 극적으로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방문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 시절과 같이 판문점 같은 곳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성사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다. 마지막은 한·미 간에 논의되고 있는 관세협상과 한·미 동맹 현대화 문제가 타결될 수 있을지 여부다. 트럼프는 연일 이 한·미 간의 관세협상이 미국 의지대로 타결된 것처럼 설레발을 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트럼프가 목표로 하는 것은 미국 핵심 제조업 역량 강화, 국방력 강화, 금융 지배력 유지다. 그는 시간과 에너지 소모적인 다자협상에 부정적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 소프트파워 외에도 ‘시장의 규모’가 국력의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한 정치 지도자다.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력을 이용한 관세 부과와 양자협상을 선호한다. 동맹국들은 그간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앗아갔고, 안보적 레버리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대한다. 그런 그가 다자회담인 APEC 정상회의에 오는 것은 결국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미·중 정상회담이 필요하다. 그가 설정한 위의 목표들은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년 중간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고, 아마도 3선 대통령 개헌을 추진할 것이다. 그 전제 조건이 중국과의 타협이다. 인플레 억제와 보다 안정적인 경제 환경이 필요하다. 외양으로는 중국을 크게 압박하지만, 실제 트럼프는 시진핑과 타협을 추진할 개연성이 높다. 그만큼 급하다. 미국식 도광양회 전략을 추진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김정은 위원장은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미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러시아와 준동맹관계를 통해 자금, 에너지, 국제적 지지를 확보했다. 최근에는 그간 소원했던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하면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했다. 트럼프에게 상당한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곧 한·미 동맹의 균열을 의미한다. 아무리 트럼프라도 체면은 물론이고, 이러한 비용을 지불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가 이번 여행을 통해 가시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한국과 관세협정을 타결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전례 없이 강한 트럼프발 압박을 받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국제정치의 국내정치화가 심화한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어 이재명 정부의 외교적 유연성은 크게 제약받고 있다. 다만, 미국에 대한 지나친 양보는 이재명 정부의 권위를 약화할 것이고, 암울한 미래는 물론이고, 쇠락하는 한국은 한·미 동맹을 유지할 레버리지를 거의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관세와 안보를 결합한 협상을 추진하려 할 것이다.
미·중 균형 속 ‘생존 공간’ 찾아야
현 한·미관계가 풀리지 않는다면, 이재명 정부는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어떠한 전향적 정책도 제대로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용외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중 전략경쟁을 준전시상태로 대하는 미·중 양국 관계에서 미국에 대한 특혜는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적대로 해석될 것이다. 최근 대미 조선 협력정책의 핵심 기업인 한화오션에 대한 중국의 제재 발표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의 제약 속에서 한·중은 정상회담에서 서로 주고받을 카드가 마땅치 않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가치를 최소화하려 할 개연성이 크다. APEC 정상회의를 주최하면서도 실로 진퇴양난에 처한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
일각에서는 중국 경제성장의 어려움과 미국의 견조한 경제성장률, 예상을 넘는 물가 안정성에 비춰 트럼프 미국의 승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미국의 두 배 이상이다. 시진핑은 여전히 건재하다. 중국의 국가건설 철학은 미국과 서방식 발전 전략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도 있다. 미·중이라는 두 제국은 21세기 중반까지도 여전히 쟁패하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로 남을 것이다. 일국의 패권보다는 경쟁의 지속을 정상적 상태로 인식하고 국가와 기업 전략을 재구성해야 한다. 국제정치적인 판단으로는 양국이 이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어떻게 잘 이루는가가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너무 빨리 중국과 타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미·중의 균형’ 속에서도 한국이 생존할 공간을 찾는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