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기’ 연작 중에서, 2011. ⓒ김지연
돼지고기 한 근 35전, 인조견 여섯 자 1원32전, 설탕 한 근 35전, 명태 한 쾌 1원, 탁주 한 말 60전. 누님이 아파 점쟁이에게 건넨 복채 10전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는 장부가 있다. 전북 진안의 정영수 어른이 3대에 걸쳐 이어온 생활의 기록, 바로 ‘경제일기’다.
정 어른이 지켜온 장부는 단순한 가계부가 아니다.
부친 회갑 때 들어온 선물을 적은 ‘물선기’에는 국수 한 봉, 돈 100원, 생꿩 한 마리, 유기 식기 한 벌, 고무신 한 켤레 등이 줄지어 있다. 가장 흔한 선물은 국수였다고 한다. 살림 형편에 맞추어 성심껏 보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머슴들의 새경을 기록한 ‘고군기’, 품일꾼들의 삯을 적은 ‘고용기’, 돈의 흐름을 정리한 ‘치부책’, 각 도와 고을 이름을 정리한 지리지에 토지대장과 축문까지 생활의 거의 모든 단면이 담겨 있다.
기록의 시작은 조부 때로, 1920~1930년대에 이른다. 낡은 시험지 뒷면을 반으로 접어 만든 장부에는 깨알 같은 한문 붓글씨가 빼곡하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귀퉁이는 부서졌고, 손때가 배어 있다. 본인 세대에 이르러서는 공책으로 대체되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한 가문의 역사와 마을의 삶이 흐른다.
2011년 진안의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에서 이 기록들이 전시되었다. 지역 주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전을 이어가던 중 정 어른의 집안에 장부가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뜻 내놓기를 주저했다. 너무 낡고 초라해 전시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가 직접 들려준 해설과 함께 전시가 열리자 관람객들은 소박하고 진솔한 기록에 따뜻한 감동을 받았다.
정 어른은 여전히 “별것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그런 ‘별것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2011년 ‘계남정미소’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장부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오래전 호남 농촌의 한 집안살이였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지나온 과거이기도 했다.
그 낡은 장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 기록되고 있는가.”
그리고 2006년부터 지역민들의 이야기와 자료를 모아온 문화공간 ‘계남정미소’가 운영난으로 사라지게 된 것 또한 안타깝다. 기억이 사라지면, 삶의 온기도 함께 식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