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극체제가 무너지고 동맹 질서가 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현실에 발을 딛고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최대한 전략적 자율성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경주에서 개최될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을 주제로 여는 다자협력체지만, 시선은 온통 미·중, 한·미, 한·중, 한·일 정상회담을 비롯한 양자외교에 쏠려 있다. 더욱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대형 외교무대라는 점에서 국익중심 실용외교의 실력을 가늠하는 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무대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11년 만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한·중관계 위상을 정립하는 것이다.
APEC 직전까지 중국은 시 주석 방한의 ‘조건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고 우리 정부도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편승한 대중 혐오를 단속하는 등 방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만큼 양국 관계의 발전 동력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양국 모두 한·중관계 악화로 인한 정책 피로감이 있었고, 특히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관계 복원을 위한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중관계 현안은 미·중 전략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한반도 비핵화, 한·미 동맹의 성격 변화와 대만해협 문제 등 외생변수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먼저 열릴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는 한·중 정상회담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APEC 회의를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미·중의 가교가 되겠다고 밝힌 것도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는 동전의 양면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한·미 동맹이다. 미국은 한반도를 넘어 대만이나 남중국해까지 포괄하는 동맹 현대화를 요구하고 대중 수출통제 동참을 강요하면서 한·중관계를 시험대에 올릴 수 있다. 둘째, 반도체 착시효과로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 현상을 가리고 있었던 한·중 경제 현상이다. 중국은 더 이상 한국 제조의 전초기지가 아니며 기술 습득과 학습의 장으로 변했다. 셋째, 한·중 민간의 상호 부정적 인식의 확산이다. 높은 반중 정서에 올라타 이를 정치화하면서 민간 교류가 상위정치(high politics)의 부담을 낮추는 공론장이 퇴화되었다. 넷째, 한반도 평화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북한은 이미 ‘적대적 두 국가’를 선언한 이후 남북관계의 창을 굳게 닫았다. 특히 지난 9월 북·중이 정상회담 등을 통해 이례적으로 ‘실질적 협조’를 강조하면서 양국 경협을 시작한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 공간도 크게 제약되었다.
이런 점에서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한국적 의제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협력 가능성을 논의해야 한다.
첫째, 우라늄 농축 권한 확대 등 군사적 자강에 기초해 수직적 한·미 동맹의 유연화를 모색해야 한다. 국가 이익이 충돌하면 이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맹도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의 내재화된 공급망 생태계의 진입로를 확보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인공지능 등 미래 산업 분야에 대한 합자회사 설립을 통해 제3시장 진출도 모색해야 한다. 셋째, 민간의 상호 비호감도 개선을 위해 구체적 지표를 설정하고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경험의 교류를 획기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넷째, 남북관계를 통한 한반도 평화의 모색이다. 한결 가까워진 북·중관계를 중·러와 북·러 관계와 묶는 한편 한·미, 북·미 관계를 연동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다섯째, 서해 한·중 잠정조치수역(PMZ)에 중국이 설치한 해상 구조물, 한·미·일 군사협력 활동 등 예민한 현안 해결을 위해 전략대화를 제도화해 위기관리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한·중관계 현안은 단선적으로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다양한 의제를 패키지로 묶는 복합전략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국적 문제의식을 발신해야 한다. 냉전적 사유와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나 실용외교를 전개하는 것이 내란을 극복하고 평화와 연대에 기초한 국가 대전략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실용의 중국어 표기인 무실(務實)과 대비되는 무허(務虛) 회의가 동시에 열린다. 이때 허(虛)는 생각과 이념 그리고 방법을 모색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고립주의를 걷는 미국의 노선과 충돌해도 다자주의 해법,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글로벌 사우스 등과의 연대, 글로벌 공급망 회복 등을 주창하면서 새로운 질서 경쟁에 나선 중국의 호응을 선제적으로 이끌 필요도 있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