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 대표는 상대를 향해 시도 때도 없이 모욕적 발언을 하고 국정감사에서 마주 앉은 의원들은 고성, 막말, 욕설을 주고받는다. 가슴속에 담아둔 말을 거침없이 속 시원하게 마음껏 쏟아내며 해방감을 만끽하는 그들을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통 사람은 목까지 차오르는 말이 있어도 가슴 깊이 꾹꾹 누르며 참고 산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내란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나라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그들은 누구인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견제와 균형에 관한 공식 제도뿐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한 관용, 정중함 같은 비공식적 사회 규범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정권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한국 정치에 관용, 정중함이 있는지는 정치 담론의 수준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여당은 야당 해산, 야당은 정권 퇴진이라는 화해할 수 없는 목표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화해할 수 없는 사이라면 그들의 언어 또한 정중할 수 없다. 여야는 상대를 이중인격자이자 매국노이며, 부도덕하고, 무능한 존재, 인간 이하로 묘사한다.
이런 정치인의 무례는 대중 사이에 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대중의 정치 담론에도 관용, 정중함이 사라진 이유다.
젠더, 지역, 종교를 자기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사람에 대한 공격적 표현은 사회 규범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정치적 공격을 자제하는 사회 규범은 없다. 오히려 정치적 공격을 부추기는 사회적 압력이 강하다. 그 때문에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공격이 박수갈채를 받는다.
의원의 무례함을 규제하는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회는 품위를 해치는 의원을 윤리 위반으로 징계할 수 있다. 그러나 양당은 문제 의원이 상대 당 소속일 때만 징계를 주장한다. 여당 윤리, 야당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윤리도 당파성에 종속되어 있다.
양극화한 정치에서는 지지 정당에 대한 호감보다 반대 정당에 대한 적대감이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 밖 비판과 압력을 받아도 당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양당이 상대 당을 치열하게 공격하는 건 상대의 변화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자기 당을 더 단단히 결집하기 위해서다. 진영 대결을 지속하기 위한 일종의 담합 행위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양당이 당내 다른 목소리를 억누르고 상대 당을 열심히 모욕하고 무례를 일삼아서 좋은 결과를 손에 쥐었나? 무례한 언동을 한 개인은 소셜미디어의 주목을 받아 유명해지고 일부 지지자를 결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속한 정당과 지지자들은 신뢰를 잃고 평판이 나빠지는 대가를 치른다. 그 결과를 우리는 잘 안다. 여당은 당과 정부의 지지율을 끌어내렸고, 야당은 바닥을 전전한다. 양당에 환멸을 느끼는 시민은 늘었다.
상대를 비판하는 것으로 상대를 바꿀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자기 당과 지지자들이 스스로 바로잡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자기 감시, 자기 교정을 해보는 것이다. 과거 당 위기 때 하던 활동이지만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사라진 당 혁신 운동을 다시 해보는 거다. 쉬운 일은 아니다. 양당에는 ‘내부총질 금지’라는 암묵적인 당 규범이 있으니 그것과도 맞서야 한다.
‘검은 양 효과’라는 것이 있다. 흰 양들 사이에 있는 검은 양 한 마리가 눈에 띄는 것처럼, 자기 집단 구성원이 사회적 일탈 행태를 보일 때 자기 집단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 구성원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보다 더 강하게 비판하고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기 처벌이 가능할지는 자기 당의 긍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자기 당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더 경쟁력 있는 정당으로 발전하려는 소망이 얼마나 절실한지에 달려 있다.
마침 양당에는 정중함을 잃고 무례한 언행을 한 인물들이 있다. 과거처럼 이들을 감싸기보다 선공후사의 심정으로 엄정하게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비상계엄 사태를 극복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의 표준이 될 것”을 희망했다. 시민이 민주주의를 이끌 지도자를 결정하는 한 시민은 지도자의 무례함에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여당이 앞장서 ‘검은 양’ 솎아내기 운동을 시작해보라.
이대근 칼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