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특파원 칼럼] 유창한 모국어에 대한 구역질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특파원 칼럼] 유창한 모국어에 대한 구역질

입력 2025.10.28 20:02

수정 2025.10.28 20:16

펼치기/접기

지난 9월 미국 보수 청년운동가 찰리 커크 추모 열기를 취재하기 위해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터닝포인트USA 본사 앞을 찾았다. 미국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 놓고 간 꽃과 편지 더미가 수십m는 돼 보였다. 침울한 표정으로 커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앳된 청년에게 다가가 ‘커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고 물었을 때였다.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끼어들며 공격적으로 말했다. “커크를 좀 이상하게 발음하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해봐요.”

그가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청년이 아버지를 밀어내고 대답을 이어가 인터뷰는 잘 끝낼 수 있었지만 졸지에 커크 이름으로 ‘R’ 발음 테스트를 당할 뻔하고 나니 당혹감과 의아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불과 약 2주 전 미 이민당국의 한국 배터리 공장 급습을 취재하기 위해 찾았던 조지아주 엘러벨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주유소 앞에서 만난 한 주민은 이민당국의 급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외국인 노동자와 공장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 공장 사람들은 영어도 못해요. 도로표지판을 못 읽어서 운전도 난폭하게 한다고요!”

난폭운전에 대한 불만은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영어 실력과 얼마나 큰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것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도로표지판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어 잘하는 미국인도 난폭운전을 하지 않나. 한국에도 난폭운전을 하는 한국인이 있는 것처럼.

도대체 이들에게 ‘영어’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비영어권 국가 정상을 만나면 상대방의 영어 실력 평가하기를 즐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서명한 행정명령도 영어를 미국의 ‘공식 언어’로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영어는 미국의 공식 언어였다. 단지 선포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실질적인 조치라기보다 상징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미국의 정체성을 ‘언어’ 그리고 그와 깊숙이 연동되는 ‘인종’을 기준으로 재조립하겠다는 선언 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공식 언어 선포와 동시에 이민자 영어교육 프로그램(ESL) 예산 전액 삭감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 영어를 모국어로 습득한 사람들만 ‘우리’ 안에 끼워주겠다는 ‘언어적 쇼비니즘’이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그렇게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다와다 요코가 쓴 이 구절에 대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자기가 편협한지 모르는 편협함에 대한 구역질’이라 해석한 바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는 한국에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언어의 이주민’으로 살아보니, 이젠 유창한 영어뿐 아니라 ‘유창한 한국어에 대한 구역질’도 조금 알 것 같다. 조선족·탈북민의 억양이나 동남아 이주노동자의 다소 어눌한 한국말에 대해 자신이 가진 편견이 편견인지 모르는 편협함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정유진 워싱턴 특파원

정유진 워싱턴 특파원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