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 “연료 공급 가능토록 결단해 달라”
트럼프도 공감하고 후속 협의하자고 화답
미국의 방위력 강화 요구 및 북한 핵능력 고려
원자력협정 개정 협의 진척 위한 지시도 요청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핵추진 잠수함 확보 의지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미국이 동맹국에 자체 방위 능력 확충을 요구하고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이 불투명한 환경 속에서 안보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최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에서 “핵추진 잠수함의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이 결단해 달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연료 공급을 허용해주면 저희 기술로 재래식 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을 여러 척 건조하겠다”고 했다. 원자력을 추진 동력으로 삼는 잠수함을 건조하되, 핵탄두가 탑재된 미사일을 싣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 대통령이 과거 핵추진 잠수함 건조 뜻을 밝힌 적은 있으나 대통령 취임 이후엔 처음이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께 충분히 설명을 못 드려,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다”라며 “우리가 핵무기를 적재한 잠수함을 만들겠다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 8월 말 트럼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에서 같은 요청을 했지만 미국 측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한 내용이며,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요구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을 통해 예외적인 군사적 이용을 수용해 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핵추짐 잠수함 건조 등 여건 변화에 따른 한국의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하고 후속 협의를 진행하자고 했다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브리핑에서 밝혔다. 향후 핵추진 잠수함에 사용될 연료와 관련한 별도 협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핵추진 잠수함에는 보통 핵무기 제조에 사용할 수 있는 농축도 90% 이상의 우라늄이 들어가지만, 20% 미만 저농축 우라늄을 쓰는 사례도 있다.
이 대통령이 핵추진 잠수함 확보를 추진하려는 건 미국의 자국 방위력 강화 요구와 북한의 고도화된 핵능력 등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핵추짐 잠수함은 디젤 잠수함보다 잠항 능력이 월등히 길어 은밀성이 높다. 이 대통령은 “디젤 잠수함은 잠항 능력이 떨어져 북한이나 중국 쪽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라며 “한반도 동해, 서해 해역 방어에 (핵추진 잠수함을) 활용하면 미군의 부담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중국을 언급한 건 미국이 대중 견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위 실장은 “이 대통령의 발언 취지는 특정국의 잠수함을 지칭한 게 아니다”라며 “우리 주변 수역에서 누구의 잠수함이든 잘 탐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거로 이해한다”고 했다.
핵추진 잠수함은 과거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도 추진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잠수함 건조에는 잠수함 선체와 소형 원자로, 핵연료 등이 핵심 요소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 건조 기술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소형 원자로 기술은 어느 정도 확보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 연료공급 합의만 된다면 수년 내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한·미 간 후속 논의에서 합의가 쉽게 이뤄질지는 불확실하다. 핵추진 잠수함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위반은 아니지만, 비확산 규범을 둘러싼 논란이 일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이 반발할 수도 있다.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한 국가는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 5개 공인 핵보유국과 비공인 핵보유국인 인도 등 6개국뿐이다.
이 대통령은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른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제한을 풀어줄 것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재차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실질적 협의가 진척될 수 있도록 지시해 주시면 그 문제가 빠른 속도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앞서 정부는 산업적·환경적 측면에서 원자력협정 개정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달했고, 미국도 이런 방향에 큰 틀에서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 실장은 “오늘은 방향성의 진전을 위해 실무 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상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한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가 있었다”고 했다.
한·미는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국방비를 올해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2.32%에서 2035년까지 3.5%로 증액하는 방안에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정상회담 합의 내용을 정리해 발표하는 ‘팩트 시트’에 이런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있다. 이 대통령은 “방위비 증액과 방위산업 발전을 통해서 자체 방위 역량을 대폭 키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방위비 지출 수준은 북한의 1년 국민 총생산의 1.4배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고 세계에서 군사력 5위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족하지 않다”라면서도 “미국의 방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방위산업 지원이나 방위비 증액은 확실하게 해나가겠다”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고 위 실장은 전했다.
위 실장은 안보 분야 협의에서 “동맹 현대화를 위한 여러 전략적 현안에 대해 미국 측의 적극적인 협조 의사를 확인했다는 게 핵심 성과”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