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 모든 사람은 ‘불안’을 안고 산다. 젊은 세대는 젊어서 겪을 수밖에 없고, 노년 세대는 곧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에 살고 있어 겪는 불안이 있고, 한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였던 부탄 사람들도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세계 곳곳의 삶을 보며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불안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오죽하면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약은 있다”라는 광고 카피로 대대적인 불안 마케팅을 하는 약이 다 있을까.
한때 정치가의 사위로 잘나갔던 한 남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것, 즉 고래와 나무를 위한 대리인”을 자처하며 “대리인으로서의 본질을 시사하는” 오키 이사나(大木勇魚)라고 이름마저 바꾸고 핵셸터로 스며든 것은 불안 때문이었다. 세상은 핵전쟁의 소문이 날로 기승을 부리던 때였고, 인류 멸망은 기정사실이었다. 지적장애 아들을 지키려면 핵셸터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인근에서 경찰과 자위대의 총기가 탈취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총기를 탈취한 청년들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상태였고, 두 가지 일의 인과관계는 불명확하지만, 곧 대지진이 일어날 거라 믿었다. 핵전쟁과 대지진에 대한 불안만이 오키 이사나와 청년들의 영혼을 잠식한 것은 아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에 대한, 소외계층으로 낙인찍힌 청년들의 불안은, 어쩌면 핵전쟁과 대지진의 그것보다 더 컸을 수도 있다.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는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현실화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지난 9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이병헌) 역시 불안이 일상화된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한 분야에서 25년 일했으면,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전문가 소리는 들을 수 있는 업력이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날아온 해고 통보는 영혼을 갈아 넣었을 그간의 수고와 노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순간 만수의 영혼은 불안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석 달 안에 재취업하겠다’는 다짐은 불안 초기 증상에 대한 방어였을 것이다. 물론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경쟁자들을 없애서라도 다시금 현직에 복귀하겠다는 일념은 만수의 영혼이 불안에 완전히 갇혀버렸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불안은, 서서히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017년 세상을 떠난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평생 ‘나로 사는 연습’을 강조했다. 2012년 출간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그는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고 말한 바 있다. 외로움 혹은 고독을 두려워하면 불안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다만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타자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불안의 기원>에서 바우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다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에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불안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사회적이다. 불안을 이기는 힘은 약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며, 연대와 협력을 통해 나온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던 옛 성인의 말은 진리이자 불안을 이기는 힘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