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雙花店)에 쌍화 사러 갔더니만/ 회회(回回)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씀이 이 점(店·가게) 밖에 나고 들면/다로러거디러 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고려 사람들의 노래 ‘쌍화점’의 첫 대목이다. ‘회회아비’는 서역에서 온 사내다. 서역은 넓게 보면 중앙아시아 이서 지역 또는 오늘날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다. 아주 좁게는 타림분지 일대다. 거기 출신 사내가 원나라 거쳐 개경에 와 쌍화 가게를 냈단 말이다. 그러다 고려 사람과 정분이 나기도 하고, 정분이 소동으로 번지기도 했을 테다. 사랑이 구설이 되면 낭패니까 연인은 입 가벼워 더 얄미운 사생활 관찰자를 단속했을 테다. 새끼 광대 녀석, 입조심해!
연애는 그렇다 치고 쌍화는 대체 무엇일까? 발효해 도톰하니 폭신해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찐빵 또는 그런 반죽으로 빚은 만두다. 다시 서역이다. 서역 사람들은 온 지구를 통틀어 가장 오래고 다채로운 분식 문화를 이어왔다. 오늘날의 캅카스, ‘스탄’ 돌림자 여러 나라의 빵과 국수를 보라. 이를테면 호떡의 먼 기원이 곧 서역의 동글납작한 빵이다. 빵은 반드시 발효를 통해 반죽을 일으켜 세운다. 덕분에 빵의 단면은 해면, 스펀지의 단면과 같은 꼴이 된다. 그렇게 해내는 데 반죽의 묘, 빵의 묘가 있다. 발효가 잘되어 개경 사람, 고려 사람의 미각을 사로잡은 서역풍의 호떡, 찐빵, 만두 종류가 쌍화겠다.
쌍화는 ‘상화’라는 이름으로도 이어졌다. 17세기 조선 여성 장계향이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은 ‘상화법’을 싣고 있다. 그 출발은 제분이다. 장계향의 시대에는 잘 여문 밀알을 세 번에 걸쳐 찧고, 쓿고, 체에 한 번 모시에 또 한 번 밭고 나서야 상화 반죽에 쓸 밀가루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누룩과 술과 밀기울 죽을 섞어 발효제를 마련했다. 그러고도 발효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사흘을 더 기다려 “누긋하게(부드럽게)” 반죽을 빚고, 빚은 덩이가 “부푸는 듯하거든” 비로소 솥에 안쳐 쪘다. 부풀지 않으면 상화가 아니다. 상화의 소는? 오이, 박속, 석이, 표고, 참버섯 따위를 참기름과 간장에 볶고 잣과 후춧가루로 양념해 마련했다. 이는 도톰한 피의 찐만두다.
또 다른 방식도 있었다. 상화법에 따르면 “껍질 벗긴 팥을 쪄 어레미로 쳐 꿀에 반죽”해 소를 만든다. 딱 단팥소 찐빵이다. 동아시아인들의 단팥 사랑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사랑하니까 당부도 많았다. 껍질만 벗기고 볶지 않은 팥을 쓰면 이튿날이면 소가 쉰단다. 장계향은 이런 방식을 권했다. “붉은팥을 죽 쑤는 팥같이 쪄 으깨어 숯불에 솥뚜껑을 놓아 볶고, 마르거든 찧어 체로 쳐 꿀에 눅게(무르게) 말아 넣으면 여러 날이라도 쉬지 않는다.” 이 조리 기술은 ‘상화병’ ‘상화떡’ 같은 말과 함께 조선 후기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보릿가루 또는 밀가루 반죽에 엿기름물, 설탕, 누룩, 막걸리 등을 발효제로 쓰는 제주의 ‘상애떡’ 또한 상화의 후예겠다. 돌아보니 20세기 이후 온갖 방식의 팥소, 단팥소, 찐빵, 단팥빵, 별별 만두에 금세 적응한 한국인의 손끝과 입맛이 더욱 새삼스럽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