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김민석 국무총리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제국적 사고다. … 우리는 제국을 해본 적이 없다. 늘 식민주의만 했다. … 공격적인 관점을 가질 때가 됐다”는 발언은 작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제국적 사고’라는 도발적인 주장은 일종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임지현)에 사로잡힌 피해자 지위에서 벗어나 질서를 주도하는 주체로 서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로 선해됐다.
사실 식민통치를 겪은 우리 공동체는 ‘다시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부국과 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담론에 취약하다. 피해자 서사는 언제든 지배자 서사로 전환될 수 있다. 진보와 보수가 화해 불가능한 적대관계인 듯 싸우지만, 우리 역사에서 주류 정치세력들은 공히 후발국가로서 추격을 통한 근대의 달성, 즉 제1세계로의 편입을 목표로 해왔다. “군사력 5위, 경제력 10위권 선진 민주국가로 우뚝 섰다”는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발언이 이를 대변한다. 트럼프의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MAGA 제국주의’(존 벨러미 포스터) 시대에 우리의 최종 귀착점이 ‘제국-되기’라는 국무총리의 발언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강한 국가’라는 논리는 내부의 적을 제거하거나, 착취하거나, 배제하는 파시즘적 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경계하며 ‘내부 식민지’ 개념이나,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 구도를 통해 성찰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초현실주의적 국제질서’ 아래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강압적 행위는 ‘국익’에 대한 묘한 거부감을 거둬내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외부 위협에 대한 합리적·실용적·현실적 대응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내란이 우리 사회 전체를 오른쪽으로 이끌었다면, 트럼프의 미국이 보여주는 제국적 행보는 전 세계를 오른쪽으로 이끌고 있다. 그렇게 ‘우리’와 ‘국가’가 등치되는 강도가 점차 짙어진다. 우리의 선택지도 다시는 지배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된다. 도처가 전쟁이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의 시대로 진입했다”(국군의날 기념사)는 대통령의 진단은 타국에 군사적으로 불평등하게 종속되지 않겠다는 ‘자주의 길’을 넘어 ‘작은 제국의 길’을 열고 있다. 우리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3.5%를 국방비에 투입하고, 핵잠수함을 건조하는 길을 택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더해 ‘사실상 핵을 가진’ 북한의 위협 속에서 정부가 ‘힘에 의한 평화’라는 논리를 계승하여 군사적 수단을 통한 억제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을 마냥 비판할 수도 없는 불행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무용하고 그런 이유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점차 줄고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힘의 논리에 복속되어 이뤄낸 ‘강한 국가’의 뒷문으로 극우포퓰리즘이 들어오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는 제국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