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시험일이 다가온다. 수능을 치른다고 곧장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어른으로 가는 문턱을 넘는 일인 건 분명하다. 부모의 보호에서 자유로워지는 나이라는 뜻이다. 한편으로 부모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20대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학생인 자녀의 성적 정정을 요청하는 부모가 비일비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국어사전에서 ‘어른’이라는 말을 찾으면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첫 번째로 나온다. 의미를 뜯어보면 나이가 들어 다 자랐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목적을 요약하면 민주시민 양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는 법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워야 할까.
‘어른’의 다른 풀이로 ‘결혼을 한 사람’도 있다. 관혼상제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언어가 시대를 반영한다면 이 풀이는 이제 사전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 여부가 어른을 가르는 시대는 진작 끝났다. 우리는 대학 졸업, 결혼, 출산과 육아 과정에 진입하는 것을 어른 되는 단계라고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어른이 되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주어지는 책임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어른이 된다.
수능이 만들어질 때, 주입식 교육을 탐구식 교육으로 바꾸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있었다. 교육 제도가 대폭 바뀌었는데, 되레 더 많은 꼼수가 양산되었다. 문제를 사고가 아닌 기술로 풀이하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스타 강사들이 생겨났고 사교육은 더욱 견고해졌다. 수능을 거쳐 전국적인 줄 세우기를 학습한 이들이 사회로 나왔다.
세상에는 더 큰 경쟁이 도사렸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향하는 동안 세상은 똑똑해졌고, 똑똑해진 사회를 따라가기 벅찬 사람들도 등장했다. 1990년대 후반, 나라가 휘청거리고 가족이 무너지던 시기에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생존을 위한 경쟁을 겪었다. 경쟁의 선에서 비켜난 몇몇은 냉혹한 세상을 체험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구성원들은 점점 더욱 심한 경쟁에 내몰렸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이다. 어른이라면 이기심은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부려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승자로 여겨지는 이에게 이기심의 한도를 넓혀주고 잘못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시대에 이런 경쟁의 보상을 몸소 체험하며 밖으로 나온 이들이 이제 부모가 되었다.
경쟁은 우리 사회를 급속도로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높은 자살률도 불러왔다. 우리나라 40대의 사망 원인으로 자살이 암을 제치고 1위에 오를 정도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그 사회의 모습을 바꿔간다. 부모를 통해 아이들에게로 전이된 경쟁은 더 섬세해졌다. 그 결과 우울, 공황장애, 자살 위기 등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곧 대학 입시철이 돌아온다. 대학 당락이 인생의 실패나 성공을 가르지는 않는다. 응시자와 부모에게는 당장 치르는 입시가 전부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이 꼭 기억하면 좋겠다. 더 늦기 전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경쟁과 욕심의 부작용에서 보호해야 한다. 거리의 철학자 채현국 선생은 “학부모가 되지 말고 부모가 돼라. 자식은 그냥 믿어주면 된다”고 말했다.
최근에 대학 입시에서 경쟁을 줄일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기사를 봤다. 그 방안이 어떻게 현실화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삶은 누구를 이겨야만 완성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삶에 완성이라는 건 없고, 어른이 되는 일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다시 사전으로 돌아가면 어른이란 ‘집단에서 나이와 경륜이 많아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앞에 누군가 등불을 들고, 괜찮은 어른으로 서주길 바라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진짜 어른을 찾는 이유일 테다.
최유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