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왼쪽)가 취임 열흘 만인 지난달 3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을 했다. 중국 외교부
강경 보수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취임 열흘 만인 지난달 31일 경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을 했지만 대만과 역사 인식 등 민감한 현안이 두드러지면서 양국 간 긴장이 오히려 고조되고 있다. 완충 역할을 해온 일본 공명당의 연립정부 이탈과 중국 내 반일 여론의 확산이 맞물리며 중·일 관계는 한동안 경색 기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중국중앙TV(CCTV)는 4일(현지시간) 다카이치 총리를 향해 “대만 문제는 중·일 관계의 정치적 기반이자 넘을 수 없는 레드라인”이라며 “일본이 진심으로 중·일 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원한다면 신의를 저버리고 ‘말과 행동이 다른’ 수작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는 다카이치 총리가 지난달 31일과 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린신이 대만 대표와 잇따라 만나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린 것을 겨냥한 것이다. 중국 측은 특히 다카이치 총리가 린 대표를 ‘대만 총통부 선임고문’이라고 호칭한 부분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는 대만을 독립된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의 입장과 충돌하는 표현이다.
다카이치 일본 총리(오른쪽)는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린신이 대만 대표와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다카이치 총리 엑스
이와 관련해 주일본 중국대사관은 지난 2일 “중국 내정 간섭”이라며 항의했다. 애초 4일 발표될 예정이던 중·일 공동 여론조사도 중국 측 요청으로 연기됐다. 매년 양국 민간단체가 공동으로 발표해온 이 연례 여론조사는 올해도 발표 직전까지 준비가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은 4일 기자회견에서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대표 면담과 관련해 “일본과 대만은 비정부 간 실무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번 만남은 그 입장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에도 유사한 면담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31일 중·일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협력과 교류 필요성에는 공감했으나 주요 현안에서는 뚜렷한 이견을 드러냈다. 시 주석은 일제 침략에 대해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거론하며 일본의 역사 인식을 간접적으로 비판했고, 다카이치 총리는 홍콩 등 중국의 인권 문제와 동중국해 정세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며 가장 민감한 현안들을 면전에서 꺼냈다.
로이터통신은 이와 관련해 “양국이 최근 몇 년간 관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해왔지만 다카이치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강경한 안보 정책이 다시 긴장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또 “다카이치가 취임 직후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비 증강과 일본 내 미군 주둔 강화에 나선 점이 이러한 우려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취임 전부터 자국의 ‘역린’을 건드리는 발언과 행보를 이어온 다카이치 총리를 예의주시해왔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1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첫 출마하며 대만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총리에 오른다면 대만과 ‘협력 메커니즘’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또 “중국이 대만을 침범할 경우 감수해야 할 비용과 위험을 명확히 인식시켜야 한다”며 미·일 합동 작전 계획 수립과 대만의 다자 협력체 및 군사훈련 참여를 주장한 바 있다.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여러 차례 참배한 점도 중국의 반발을 샀다.
그는 아베 신조 정권의 총무상으로 재임하던 2016년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중국 화웨이의 5세대(5G) 통신 장비를 공공부문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주도했으며 일본의 대중국 기술 디커플링(공급망 분리)을 이끈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 당시 중·일 간 첨단기술 협력을 제한하는 ‘경제안전보장추진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대중 강경 노선을 공고히 한 인물이라고 신화통신은 보도했다.
특히 올해는 중국이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을 맞아 ‘대만 광복절’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며 항일 담론과 양안 관계 관련 의제를 밀어붙이는 시점이라 다카이치 총리의 행보가 한층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일 관계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던 공명당이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한 것도 양국 관계 경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공명당은 2009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등 양국 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중국 공산당과의 중·일여당교류협의회 등을 통해 대화를 이어왔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 철폐 등 실질적 현안 논의에도 앞장서 왔다. 지난해 5월 방중한 공명당 대표단은 “공명당의 중·일 우호에 대한 신념은 양국 관계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달 공명당이 26년 만에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이탈했고 자민당은 우익 성향의 일본유신회와 손을 잡았다. 유신회는 전반적으로는 대중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유신회 소속의 세키헤이 참의원은 대만, 댜오위다오, 신장웨이우얼·시짱(티베트) 문제와 관련한 발언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와 자산 동결 제재를 받은 바 있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으로 귀화한 세키헤이 참의원은 반중을 내세워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의 강경한 대중 외교는 일본 내 보수층의 지지를 얻고 있어 정책 기조를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야이타 아키오 인도태평양전략연구소장은 대만 자유시보에 “중국이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 내 보수층은 다카이치 총리가 이번 회담을 통해 자주적 외교 의지와 분명한 원칙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3일 일본 민영방송 TBS와 계열 네트워크 JNN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은 82%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