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 소재지 시골 마을에 살며 재가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가 얼마 전 한 할머니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요양기관으로 모신 것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엄마는 도둑으로 몰렸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엄마에게 “왜, 뭘 훔쳤다고 하시던데?” 묻자, 돌아오는 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순대! 순대가 없어졌다 안 카나!” 나는 더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순대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제야 좀 진정되는지 엄마는 “그래, 금붙이라도 없어졌다 캤으면 우얄뻔 했노”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사실 순대가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약을 두고 실랑이가 있었다. “약이 없어졌다고예? 다 드신 거 아이라예? 곧 병원 가시잖아예.”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몸에 좋다면 뭐라도 먹는 게 사람이라며 엄마를 의심했다.
결국 노인복지센터에서 할머니댁을 방문해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여러 정황과 할머니의 상태를 살핀 센터장은 진료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할머니에게 초기 치매가 시작된 것 같다고 판단했다.
재가방문 일을 하기 전 15년 남짓 요양원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본 엄마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요양원과 달리 둘만 있는 집에서는, 그것도 자신이 도둑으로 의심받는 자리에서는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봤다. 엄마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이제 할머니는 누가?” 하고 묻자 엄마는 센터장의 말을 전했다.
“보호자가 어르신의 치매를 받아들여야 다음을 계획할 수 있거든요. 지금 상태에선 다른 요양보호사가 가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될 거예요. 그런데 보호자가 치매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엄마에게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있겠지만 정말 딱하게 된 것은 할머니다. 지금도 자녀들은 어쩌다 한번 다녀가기에 결국 그들이 치매를 인정할 즈음이면 할머니의 증세는 더 깊어질 테고, 그때면 시설에 모시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사정을 헤아린 엄마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같은 동네 또 다른 할머니댁으로 출근하게 됐다. 70대를 새댁이라 부르는 시골 동네의 현실. 나는 “엄마, 몇년 후에는 다시 시내로 나가 살아야 하지 않겠어?” 하고 운을 뗐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지만 엄마 역시 경로우대 대상자로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그래야지…” 대꾸했지만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가 귀촌한 뒤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운전할 생각도, 계획도 없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그런들 막상 엄마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서울에서 닿기까지 그녀가 무사할 수 있을까 싶지만. 한편 이런 준비를 하는 게 참 서글프기도 하다. 과연 응급상황에 대처하기 좋다는 이유로 삶의 거처를 옮기는 일이 행복에 가까운 걸까?
김달님 작가가 쓴 노년 탐구 에세이 <뜻밖의 우정>에도 이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노년의 장면 가운데 그는 ‘노노케어’와 ‘생활지원사’ 제도를 통해 서로를 돌보는 노년과 요양병원 생활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던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전하며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는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살아온 지역과 집에서 가능한 한 오래,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노인들이 살고 싶은 곳에서 존엄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사회는 더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그의 말속에서 엄마와 나의 근미래가 겹쳤다.
초고령 사회가 되면서 다양한 노인복지 정책이 마련되고 있지만 현실 사정은 녹록지 않다. 누군가는 요양보호사의 발소리에 하루를 열고, 누군가는 병원 가는 날이 거의 유일한 외출이다. 돌봄이 제도에 맡겨질수록 노년의 삶은 수동적으로 흘러간다. 당장 불편을 덜어주는 것에서 나아가, 노년의 삶을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 절실하다. ‘누가, 어디까지, 어떻게 돌볼 것인가’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미래를 묻는 일이고, 우리 모두의 일이 되고 있다.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