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들었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주의 깊게’ 들었던 음반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바로 이문세 4집.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담긴 그 음반. 초등학교 5학년의 마음에 불을 지른 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LP 뒷면을 뒤적였던 그때, 노래마다 반복되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영훈 작사·작곡, 김명곤 편곡.
작사는 가사를 쓰는 일이고, 작곡은 멜로디를 만드는 일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편곡’이란 말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친구나 형들에게 물어봐도 시원한 답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게 뭔가 멋진 일일 것 같다”는 막연한 감정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편곡이라는 말의 미스터리에 빠져, 그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될 때까지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곡마다 빠짐없이 적혀 있는 그 이름, 김명곤. 그는 분명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음악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쌓이면서 비로소 편곡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작곡이 악보 위의 음표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편곡은 그것을 구체적인 ‘소리’로 구현하는 디자인의 영역이었다. 쉽게 말해, 작사·작곡가가 만든 음악이라는 몸 위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히는 작업. 같은 멜로디라도 편곡자의 해석에 따라 록이 되기도, 발라드가 되기도 한다. 담백한 소품이 되기도 하고, 복잡하고 화려한 사운드로 변신하기도 한다. 김명곤은 바로 그 ‘옷을 입히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내공이 있어야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어린 마음은 그 상상만으로도 불타올랐다.
음반을 모으면서 그의 이름은 더 자주 눈에 들어왔다. 과장하자면, 거의 모든 히트 음반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나미, 소방차, 이문세, 김수철, 최호섭, 이상은, 신승훈, 김건모… 스타일도, 세대도 다른 수많은 가수의 대표곡들 속에서 김명곤은 편곡자로 존재했다. 특히 이문세의 전성기였던 3집부터 7집까지의 거의 모든 곡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김명곤의 편곡을 마치 히트곡의 선율을 기억하듯 기억한다는 점이다.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나 ‘붉은 노을’을 떠올려보라. 우리 머릿속에는 멜로디보다 먼저 전주가 흘러나온다. 나미의 ‘빙글빙글’이나 정수라의 ‘환희’ 또한 그 ‘빠밤’과 ‘짜잔’하는 인상적인 반주 없이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그의 편곡은 멜로디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 곡의 핵심 매력이었다. 오늘날 비트 메이킹이 작곡의 중심이 된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역할은 단순한 편곡자를 넘어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의 영역을 오갔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JTV에서 주관한 전시 ‘KPOP 슈퍼노바: 김명곤으로부터’에 함께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김학래, 김형석, 구창모 등 뮤지션들과 대담을 나누고 그가 생전에 남긴 미발표 음원들을 들으며 내가 알고 있던 김명곤은 그 위대함의 일부에 불과했음도 알았다. 파면 팔수록 놀라운 것들이 나오는 그의 작업들. 동료들의 회고처럼 그는 차원이 달랐던 천재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4년. 만약 김명곤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한국 대중음악의 풍경은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가 남긴 과감하고 실험적인 사운드의 ‘장(場)’ 속에서 K팝의 단초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김명곤으로부터.
김영대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