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칼럼에서 필자는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내는 6가지 가상경험 중 ‘유사신빙적 물리 경험’ ‘인공적 물리 경험’ ‘유사신빙적 사회 경험’을 다루었다. 이번 글에서는 나머지 3가지 유형을 고찰하며 AI가 만들어내는 관계와 자아의 확장을 살펴보겠다.
네 번째 유형은 AI 에이전트나 가상 캐릭터와 관계를 맺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인공적 사회 경험’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AI 동반자는 사용자의 정신건강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 예컨대 장기간 AI와 꾸준히 대화한 사람들의 우울증 지수는 현저히 낮아졌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인 ‘연결감’과 ‘소속감’이 서비스 형태로 구현된 셈이다. 이른바 ‘서비스로서의 애착’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완벽한 동반자는 현실 인간관계를 회피하게 만들 수 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약이 될 수도, 더 깊은 고립으로 이끄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이 관계가 진짜인가?”보다 “이 관계를 통제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다섯 번째는 ‘유사신빙적 자아 경험’이다. AI는 사용자의 SNS 활동이나 피트니스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개인이 인식하지 못한 심리 상태를 감지하거나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의 ‘퓨처유(Future You)’ 프로젝트는 사용자의 목표와 가치관, 라이프 스토리를 기반으로 미래의 자아를 생성해 현재의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한다. 이 경험은 참여자의 학습 성과, 저축률, 행복지수를 모두 높였다. ‘은퇴 자금을 모아야 한다’는 추상적 과제가 ‘미래의 나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는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목표로 전환되는 순간, 인간은 즉각적인 감정적 동기를 부여받는다. AI는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하며, 자기 성찰 과정을 독백이 아닌 ‘미래의 나와의 대화’로 재구성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인공적 자아 경험’이다. 이는 게임 속 아바타처럼, 현재의 정체성과는 다른 가상의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여러 미디어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아바타의 특성이 사용자의 실제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프로테우스 효과’가 존재한다. 자신과 다른 성별의 아바타를 사용한 사람들은 성 고정관념이 줄었고, AI가 생성한 다양한 사회경제적 삶을 체험한 후에는 편견이 낮아지며 기부 행동이 두 배 이상 늘었다. 필자의 연구에서도 대학생들이 360도 카메라를 통해 노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뒤, 노인 빈곤 문제에 대한 공감이 크게 향상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가상 정체성 경험이 인간을 더 공감적이고 이타적인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6가지 가상경험 프레임워크는 AI 시대 인간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탐험 지도다. 스트레스 완화, 우울증 예방, 편견 해소, 창의성 향상 등 AI가 가져오는 변화는 이미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이 6가지 경험은 서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며, 인간의 삶을 더욱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AI가 그리는 가상경험은 현실의 대체물이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거울이다. AI가 제시하는 지도는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서 있는 지형을 보여줄 뿐이다. 그 여정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이관민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