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됐다. 한국 정부는 “국익 지키고, 글로벌 경쟁력 높였다”고 홍보했다. 불확실성이 해소됐고 투자가 확대될 기회라고, 재계는 환영과 감사 일색이다.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나 부정적 평가도 있다. 애초에 내줄 이유 없는 돈을 빼앗겼으니 잘해도 ‘선방’했다는 평가를 넘어서기 어렵다.
관세협상만 놓고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불확실성이 또 다른 불확실성으로 전이되는 시기를 지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가장 가까운 분기점이다.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진전된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워졌다. 이후의 시간은 미국이 헤게모니를 재구축하기 위한 도전의 시간이기도 했다.
세계시장으로 중국을 끌어들인 미국은 자신의 패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으로 중국을 지목했다. 견제와 적대가 본격화되면서 동아시아가 격전장이 됐다. 코로나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을 가시화했다. 원재료부터 완제품까지 거대한 국제 분업 체계로 가치사슬을 이루었던 ‘아름다운’ 그림은 악몽의 이유가 되었다.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각축이 이어지는 과정에 한·미 관세협상이 놓여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회의 결과가 아니라 미·중 정상회담이나 한·미 정상회담에 쏠렸던 것에서 볼 수 있듯 당분간 다자주의적 해법이 기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으로 힘이 기우는 때가 빠르게 오지도 않을 듯하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중국의 판정승’이라는 평가가 많다. 물론 이것이 몇전 중의 하나가 될지는 아직 열려 있다.
한국도 국익만 생각하며 각자도생의 길을 개척하면 될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다 보면 위기를 벗어날까? 한·미 관세협상에 대한 평가가 어떻건 ‘국내 투자 위축, 산업 공동화, 일자리 감소’는 모두가 우려하는 바다. 이 걱정 어딘가 익숙하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자신을 “노동자를 위해 싸우는 투사”라 말하며 관세폭탄의 명분으로 삼는 말이다.
더 싼 노동력 찾아 기업이 해외로 가는 게 우리 경쟁력이다, 외국 기업 들어오게 노동자 권리 단속하는 게 우리 좋은 일이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망쳐온 방식이다. 통제되지 않는 금융화는 위기를 더욱 키웠다. 투자를 구걸하지 않고 협박으로 뜯어내는 것은 미국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무역 등 기존 규칙을 무너뜨리지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지 못하는 미국의 모습은 패권의 증거이자 패권이 무너진 증거다. 관세협상 이후 대미 투자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한국을 더욱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는 주문들이 이어진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폐허 속에 좀비들을 남겨놓았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서 펼쳐진 현실은 줄곧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불안정 노동, 실질소득 감소, 가계부채 증가, 주거 불안, 돌봄 위기, 생태 파괴, 농업 붕괴… 불평등이 심화하며 사회가 파괴된 자리를 떠받치는 일은 이주노동자에게 돌아갔다. 트럼프가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펼치자 일부 산업이 아예 불능 상태에 빠졌던 상황은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위기의 구조적 해법을 찾는 일은 늘 뒷전으로 밀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전부터 쌓여온 반세계화 여론은 대안세계화의 정치로 조직되지 못하고 극우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미국 우선’을 말하며 민중의 분노를 흡수하는 트럼프는 위대한 왕이 아니라 왕관을 좋아하는 극우 정치인일 뿐이다. 그는 대안 없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지만 그래서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되고 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지워진 탓이다.
지금이야말로 다른 세계를 말해야 할 때다. 마침 맘다니의 뉴욕시장 당선 소식도 전해진다. 세계는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가 가능한지 질문하는 중이다. 우리도 질문해야 한다. 공장을 닫는다고 노동자의 삶까지 닫아버리게 둘 것인가, GPU를 얻었다고 신나 하며 지구를 태울 것인가, 잠수함이 무기라는 사실을 잊고 주식 호재라 반길 것인가. 사회의 목적은 자본주의 재생산이 아니며, 경제의 목적은 사회의 재생산이어야 한다는 지극한 상식부터 확인하자. 자본이 투자를 놓고 흥정할 때 우리 삶을 협상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APEC 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라며 정부가 벌인 합동단속으로 이주노동자 뚜안이 사망했다. 그는 이주노동자라 국익으로 계산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에 맞서 우리가 들어야 할 깃발은 ‘한국 우선’이 아니다. 사람이 깃발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