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출판사의 문학상 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응모된 단편소설이 1000편이 넘었다. 대상작 1편과 가작 4편 등 총 5편을 뽑았기 때문에 경쟁률 또한 높았다.
나를 포함해 4명의 작가로 꾸려진 심사위원단은 쉼 없이 소설을 읽어야 했다. 심사위원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소설적 완성도를 갖추었는지, 문제의식에 새로움이 있는지, 기성 작가의 스타일을 따라 하지 않고 개성적인 목소리로 서술하는지 등을 기준으로 삼아 투고작을 읽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응모작은 초반 한두 장만 읽어도 본심에 올릴 만한 작품인지 판단할 수 있었다. 끝까지 다 읽는다고 해도 그 결정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한때는 나도 투고자였으므로 그 절실한 마음을 안다거나 하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에 붙들려 있었다.
효율적으로 심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본심에 올릴 작품을 고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명확했고 그 작품들의 미덕을 설명하기도 쉬웠다. 반대로, 완성작으로 보기 어려운 다소 미흡한 작품들은 쉽사리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오랜 시간 논의되어 오면서 여럿이 동의할 만한 수준에 이른 ‘문학성’이, 각각의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울림을 줄지까지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이 써낸 모든 이야기에는 고유한 매력이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무책임한 말이지만, 어떤 기준에서는 미달이라 해도 각각의 이야기는 그것만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쓸쓸한 한 인물이 자신의 삶이 무너진 이유를 구구절절 읊는, 자기 연민과 한탄으로만 채워진 투고작이 많았다. 소설의 필수 요소라 칭해지는 사건도 발생하지 않으며, 마찰할 타인조차 등장하지 않기에 이렇다 할 갈등도 없었다. 그렇다고 수필이라고 칭하기도 어려웠다. 구태여 말하자면, 치열한 끄적임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비평가로서 평가해야 한다면, 작가인지 인물인지도 모를 이가 개인에 유폐된 채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므로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이 너무나 진실하고 절절해서 나도 같이 고독해졌다. 상징이나 비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감정이 눅진하게 마음에 들러붙었다. 한 올의 거짓도 없는 고백의 문장들, 작품성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진솔한 감각들이 몸을 휘감았다.
심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끝이 났다. 상을 받을 만한 작품들이 수상하게 되었다. 긴 심사평을 공들여 써서 보냈고 투고작은 반환되지 않으니 폐기될 것이다. 여전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그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나를 겸허하고 숙연하게, 또 약간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몰라 빛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보려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엉성히 주춤거리게 됐다. 어떤 글이 우연한 순간에 어디로 닿아 누구의 삶을 바꿔 놓을지 예측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문학에 대해 도로 모르게 되어버렸다는 것도.
몇년 전, 심하게 앓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내 삶을 붙들어준 것은, 내가 찬양해 마지않던 명작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여겨보지 않았던, 짧고 평범한 문장들이 담긴 수기집이었다. 곧 괜찮아질 거라는 메시지를 가진 진부한 이야기가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때 어렴풋하게 느꼈던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작품성 또는 문학성이라는 것은 언제든, 누구에게서든 재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늘 생성 중인 변화무쌍한 존재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들은 그러한 평가 기준과 무관하다는 듯이 반짝 살아 있다. 잘 쓴 글에 목말라하느라 놓쳤던, 쓰려는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만져본다.
성현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