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생각의 학교이자 고질(痼疾)을 고치는 병원이다. 한편으론 색다른 노래방이기도 하다. 술기운을 다독이며 ‘앗싸’ 기기에 네 자리 숫자를 눌러 유행가 하나 고르듯 호젓한 산길 걷다가 바람, 기온, 기분, 날씨의 네 박자에 맞춰 노래 하나를 호출한다. 어느덧 목덜미가 시큰하고 소매가 긴 옷이 그리운 계절에는 이런 노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얼마 전에는 단풍의 유혹에 넘어간 김에 유심초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랑이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나의 사랑 그대여 내 마음 아나요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리움이 눈물 되어 흘러도 내 모습 그대에게 잊혀져도 그대를 사랑하오.”
어쩐지 요즘은 졸장부가 되는 느낌이 자주 일더라. 사나이로 시작하는 노래로 못난 위안을 삼기도 한다. 통영 우도 갔다가 멀리 억새와 갈대 사이로 구멍섬을 보았다. 썰물에 확 드러나는 바위 중앙이 내 가슴처럼 뻥 뚫려 있다. 그 풍경에 합세하며 내 딴에는 동굴 같은 음성으로 띄워보지만 혼자 듣다가 혼자 웃었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아라.”
영암 월출산에 오른다. 평지돌출한 듯 바위가 압도하는 산. 어디로 굴러가다가 그만 여기에서 멈춘 바위. 한 걸음이 모자라 아직은 들어갈 수 없는 바위 앞에 서면 심정이 좀 복잡해진다.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이 절창은 ‘애모’의 한 소절이다. 한 모금이 남아서 다가가는 사람아, 이 외마디는 몸을 가진 모든 이의 마지막 미련인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모자란 한 발짝 앞에 늘 서 있는 것.
최근에는 나이가 자주 끼어들기도 한다. 나보다 엄청 연로하신 바위를 짚어보면 생각보다 훨씬 피부가 차다. 이렇게 젊은 피가 도는구나. 저 속에 누가 있어 ‘한마당 타오른 그 불길’을 다독이는가. 금 간 손바닥으로 공중을 두드리며 바위 앞에서 불러보는 임희숙의 노래. “긴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낯설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 나도 내가 아닌 듯해라/…/ 누군가 말을 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 궁리출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