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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전을 그만두자

입력 2025.11.09 22:07

수정 2025.11.0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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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 서비스 이용자 2000만명에 들지 못한 1인으로서, 이 논쟁이 이렇게 뜨거울 일인가 깜짝 놀랐다. 전국택배노동조합이 노동자 과로와 야간노동을 줄일 수 있도록 자정~새벽 5시 사이의 초심야 시간 배송을 제한하자고 제안하면서 논쟁이 시작됐다. 사실 교대근무와 야간노동이 오랜 진화 역사에서 인간의 몸에 새겨진 일주기(circadian) 리듬을 파괴함으로써 여러 건강 문제를 초래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병원이나 소방서처럼 어쩔 수 없이 교대근무나 야간근무가 필요한 직종에서는 근무 시간 단축과 휴식 보장, 근무조 편성과 배치 조정, 수면 보조 기술 등 건강 피해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탐색해왔다.

그동안 국내에서 교대근무, 야간노동을 둘러싼 갈등은 대개 노사 간에 일어났다. 안전보건 지침을 제시하고 노사 간 ‘대화의 규칙’을 만드는 것은 정부 역할이지만, 근로환경과 인력배치, 보상은 모두 ‘몫’을 둘러싼 기업과 노동자의 계약이자 투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새벽배송 논쟁은 이런 전형적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논쟁의 공간에 ‘사측’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벽배송을 제한하자는 민주노총과 보건 전문가들이 한편에 서 있고 상대 쪽에 소비자, 택배노동자,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연합군을 이루고 있다. 한쪽에선 건강과 안전을, 반대쪽에선 편의와 선택, 생계를 말하고 있다.

예컨대 소비자는 이미 새벽배송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이것이 없어지면 큰 불편이 뒤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주간보다 급여가 높고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심지어 주간 일자리가 있어도 일부러 새벽배송 일을 하는데 이를 제한한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며 비판한다. 농어업인과 소상공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온라인쇼핑협회는 이들 연관 산업 종사자들에게 피해가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새벽배송 기사들의 이송을 담당하는 야간 전세버스 종사자들은 생계를 위협하는 조치라고 한다. 소셜미디어에선 민주노총을 탈퇴한 쿠팡 노조에 대한 보복이다, 국내 진출하려는 중국 물류업체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엘리트들의 온정주의라는 일침도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백가쟁명이 일어나고 있는데 정작 ‘사측’은 조용하다. 새벽배송이 제한되면 가장 크고 직접적 피해를 입게 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데자뷔랄까, 이런 광경을 이미 본 적이 있다. 사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정부가 담배, 알코올 같은 건강 유해상품 규제를 강화하려 할 때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기업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제품이 안전하니 규제하지 말라고 반대하는 경우는 없다. 비만과 운동 부족 등 다른 요인들이 더 큰 문제라는 연구자들,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강조하는 소비자 운동, 원재료 생산 농가와 이들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점과 음식점 등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조직적 반대가 주축이다. 국내에서는 소주 가격 인상을 시도할 때마다 ‘서민의 애환’ 논리가 등장했다. 국내외 연구들은 이러한 ‘문화 전쟁’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는 기업의 전략과 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번 새벽배송 논쟁에서 물류 기업이 검은손으로 반대자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당사자, 책임 있는 주체가 빠져 있는 논쟁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새벽배송을 통해 이윤을 얻고, 이를 위해 막대한 설비투자와 인력, 공급망을 구축해온 기업이야말로 대안을 만들고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실 소비자들은 (불편하겠지만) 며칠 미리 주문하도록 습관을 바꾸면 된다. 한국인의 놀라운 적응력이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현재도 자발적·비자발적으로 새벽배송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생명과 안전을 우려하는 이들, 생계가 절박한 이들끼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리전을 치르는 것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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