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산업이 요구하는 천문학적 투자가 ‘금산분리’라는 규범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의 진단처럼, 기존 반도체 공장 2배 규모의 투자는 “기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이 됐다. 이에 김용범 정책실장이 답을 내놨다. 바로 ‘특별법’을 통해 AI·반도체 분야에 한정해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산업자본이 금융사를 소유하지 못하게 막아둔 이 빗장을 풀어, 150조원 규모로 추진되는 ‘국민성장펀드’에 재벌이 세련되고 공격적으로 참여하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복안이다. “독점 폐해를 막는 안전장치”를 전제로 한다지만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이는 핵심을 완전히 비껴간 처방이다. 글로벌 AI·반도체 시대를 열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선의와 산업정책의 큰 그림마저, 이 엉뚱한 논의로 인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반도체 같은 전략 산업에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는 데 매우 동의한다. 지금 세계 각국이 벌이는 경쟁 양상을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이제 기업 간 경쟁의 시대를 지나, 정부가 막대한 현금을 쏟아붓는 ‘보조금 전쟁’으로 번졌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투자금의 10%에 달하는 525억달러의 보조금을 풀었고,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아예 공장 설비 투자의 최대 50%까지 지원한다. 일본 역시 TSMC 공장 유치에 비용의 절반을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의 산업정책은 명확하다. 바로 공장 설비 투자에 대한 정부의 ‘직접 보조금’ 지급이다. 천문학적인 건설비용 자체를 정부가 직접 낮춰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국에서는 엉뚱하게 ‘금산분리 규제 완화’가 해법인 것처럼 튀어나왔는지 의아하다. 이는 기업의 천문학적 투자비용을 낮추어 경쟁력을 가지게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계열사로 대규모 펀드를 운용하게 해주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 아닌가. 투자비용이라는 문제와는 무관한 논의다.
‘금산분리 규제 완화’ 카드가 튀어나온 이유를, 정부가 기업에 돈을 그냥 주는 ‘직접 보조금’의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이라고 선의로 해석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이상하다. 재정 부담을 덜 해법 역시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쓰는 ‘상단 공유(Upside Sharing)’ 조항이 하나의 해법이다. 이는 보조금을 지급하되, 투자가 크게 성공하면 정부가 지원금 일부를 환수하는 방식이다. 이 모델은 기업의 투자 위험은 낮춰주면서도 성공 시 국민도 이익을 공유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장치다. 즉, 정부가 구상하는 150조 ‘국민성장펀드’가 정부, 민간, 해외 투자 자금을 모아 SK하이닉스에 투자하는 구조를 짜는 데는 다양한 옵션이 있고 해외 선례도 많다. 여기에 금산분리 규제 완화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일반지주재벌)이 금융 문어발 확장을 못하게 막는 규율이다. 설마 SK그룹이 ‘국민성장펀드’를 자신들의 계열사로 편입해야만, 즉 자신들이 직접 펀드를 운용해야만 SK하이닉스 공장 증설 투자가 가능해진다는 자아도취적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논의가 꼬일 때는 명분 뒤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 불거진 지주회사 규제 완화 논의도 그런 전형 같다. 정부는 글로벌 AI·반도체 패권 경쟁에 대응할 대규모 투자 재원 마련을 명분으로 ‘금산분리 완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 논의의 한가운데에는 SK그룹이 있다. SK하이닉스라는 반도체 계열사를 둔, 금산분리 규제를 받는 지주회사 체제가 바로 SK그룹이다. 아마도 SK그룹은 손정의의 소프트뱅크그룹 모델을 꿈꾸는 듯하다. 소프트뱅크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통신, 반도체, 그리고 거대 투자펀드(비전펀드)라는 세 축으로 구성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비전펀드 1’이다.
2017년 약 1000억달러 규모로 출범한 이 펀드는 소프트뱅크 자신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등 중동 자본과 애플, 퀄컴까지 출자자(LP)로 끌어들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펀드의 전략이다. 펀드의 목적은 자기 계열사 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버, 디디추싱 같은 ‘외부’의 기술 유니콘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금산분리 완화 요구는 AI 반도체 패권 경쟁이란 본질과 무관하다. 이 논의는 SK그룹의 바람을 풀어주려는 ‘맞춤형 특혜’에 가깝다. 펀드를 운용하려는 SK의 사적 목표와 AI 투자라는 국가적 명분을 절묘하게 연결시킨 것이다. 합리적 대안을 외면하고 특정 기업의 이해를 유일한 해법처럼 포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산업정책이 실패하는 ‘특혜’의 입구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