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가방끈 활동가들이 말하는 ‘입시를 거부한 이유’
학력, 학벌주의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의 활동가 연혜원, 공현, 난다(왼쪽부터)씨가 1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손팻말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한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날은 일종의 ‘명절’이다. 거리 곳곳엔 수험생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수능 당일엔 비행기까지 잠시 멈춘다. 온 나라가 수험생에 집중하는 이 날을 조금 다르게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벌 중심 사회에 저항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 활동가들을 지난 10일 만났다. 이들은 ‘수능 100일’ 대신 ‘저항 100일’을 세며 ‘수능 다음의 세계’를 상상해왔다.
“사람들 대학 이름만으로 평가
내 모습 내 생각 찾고 싶었죠”
“학벌주의 사회 안 바뀌겠지만
수능이 만든 세계 벗어나려 해”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이 공유해온 저항일력 중 일부. 투명가방끈 제공
투명가방끈은 2011년 ‘대학입시거부선언’에서 출발했다. 대학 진학을 거부한 청소년 등이 모여 “우리는 ‘낙오자’가 아닌 ‘거부자’”라고 선언하고 ‘가방끈’으로도 불리는 학벌주의가 사라지길 바라며 투명가방끈을 결성했다. 이들에게 수능은 ‘미래로 가는 통로’가 아닌 ‘미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청소년의 삶이 ‘대입’이란 획일적 목표에 휩쓸려가는 현실을 비판하며 투명가방끈은 매년 11월 대학에 가지 않은, 혹은 가지 못한 청소년들의 존재를 드러내 왔다.
올해 수능을 앞두고 투명가방끈은 ‘저항일력’을 만들었다. 수능을 100일 앞둔 여름 무렵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수능 100일을 세던 문화를 뒤집어 ‘수능 저항 100일’을 기록해왔다. “아무도 시험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시험 그 이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에서 사다리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함께 손잡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등 입시 경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쓴 문장들을 모아 하루 하나씩 기록했다.
학력, 학벌주의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의 활동가 난다, 공현, 연혜원(왼쪽부터)씨가 10일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손팻말 문구를 작성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저항일력의 문장들은 활동가 자신을 드러내는 고백이기도 했다. 투명가방끈 결성부터 함께한 활동가 난다(활동명)씨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단풍이 들고 꽃이 피는 세상을 두고 책상 앞에만 10시간씩 앉아 있는 답답함”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성적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어른들의 말이었다. “너 그러다 지방대 간다”, “나중에 커서 배추 장사나 한다” 등 점수로 ‘실패자’를 구분 짓는 말들이 싫었다. “책상 앞에 앉아도 진짜 내 자리는 없는 느낌”을 떨치기 위해 난다씨는 학교 밖으로 나왔다. 고등학교 안에서 ‘끈기 없는 학생’으로 평가받던 난다씨는 투명가방끈에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다.
활동가 공현(활동명)씨는 소위 ‘명문대’에 진학했다. 사람들은 오직 대학 이름으로만 자신을 평가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학벌로만 평가받는 현실이 재미없었던 공현씨는은 대학을 떠나 투명가방끈에 들어왔다. 공현씨는 자신을 ‘명문대 중퇴생’이 아닌 “웹소설 10개를 동시에 읽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웃었다.
연혜원씨는 대학원 연구 과정에서 “학벌주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을 인터뷰한 혜원씨는 “공부를 못하는 애”, “대학을 못 간 애”라는 낙인이 현장실습생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까지 정당화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대학원 내에서 출신학교 등으로 차별받는 자신의 모습이 그 학생들과 겹쳐 보였다. “불행이 닥치도록 설계된 세계가 수능이 만든 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혜원씨는 지난 10일 “우리는 수능이 만든 세계에 살지 않는다”라는 구호를 손에 들었다.
물론 ‘수능 바깥의 세계’를 살기란 쉽지 않다. 난다씨는 “사람들이 학교를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자주 묻는다”며 “‘저학력자’라서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할 때 자책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엇이 나를 후회하도록 만드는지’ 되묻고 싶다”며 “투명가방끈의 세계가 더 넓어져서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긍정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학력, 학벌주의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의 활동가 연혜원, 공현, 난다(왼쪽부터)씨가 1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손피켓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오는 13일 수능이 치러진다. ‘저항 100일’의 끝에는 무엇이 올까. 혜원씨가 말했다. “먹물이 담긴 컵에 물 한 방울을 넣는다고 먹물이 사라지진 않지만 그 한 방울이 쌓인다면 물이 투명해질 수 있잖아요. 한국 사회 학벌주의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100일 동안 매일 한 문장을 기록하듯 작은 저항들을 꾸준히 쌓는다면 우리 사회 ‘가방끈’도 투명해지지 않을까요?”
학력, 학벌주의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의 활동가 난다씨가 1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학력, 학벌주의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의 활동가 공현씨가 1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학력, 학벌주의를 비판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의 활동가 연혜원씨가 1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