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기온의 변화일까, 옷차림일까. 어쩌면 스마트폰일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패딩 점퍼 파격 세일’을 알리는 광고 문자가 온다. 스마트폰의 창을 열면 이미 한겨울이다. 내 방 창문보다 먼저 눈앞에 계절을 펼쳐놓는다.
겨울의 입구다. 지갑을 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계절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올빼미 같은 것.
며칠 전 동네에 올빼미가 돌아왔다. 지난해에는 네 마리가 찾아와 함께 지냈는데, 올해는 한 마리가 먼저 온 모양이다. 옛 도정공장의 큰 나무에 매달린 그 새의 낮잠을 훔쳐보며 추운 계절이 다시 왔음을 실감한다. 돌아올 때를 정확히 알아차리는 올빼미의 시간 감각은 얼마나 정확한가. 밤의 길이로 계절을 재는 이 새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 호르몬의 분비 리듬이 변해 번식기나 이주 시기를 조절한다고 한다. 빛의 밀도와 길이, 온도 변화로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진 하루 끝에 올빼미를 떠올려본다. 빛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몸을 알아채는 능력이 비단 그 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오래된 달력, 절기를 보자. 태양의 궤도에 따라 스물네 개의 지점으로 나눈 그 달력은 시간에 숫자가 아니라 이름을 선물한다. 봄의 이름은 움직임과 소생을, 여름은 무르익음과 충만함을 품고, 가을은 수분의 변화로, 겨울은 눈의 크기와 추위의 강도, 어둠의 길이로 계절을 말한다.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노동이 함께 빚어낸 이 언어와 비교하면, 숫자와 데이터로 말하는 지금의 언어는 얼마나 가난한가. 겨우 20% 할인된 겨울이라니…
호주의 원주민,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에는 ‘왼쪽’과 ‘오른쪽’이 없다. 그들은 모든 방향을 동서남북으로 말하고, 그 언어를 쓰는 한 자신이 세계의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감각한다. 그렇다면 소비의 언어는 어떨까. 신상품, 할인, 기간 한정 같은 말들은 시간의 즉시성과 소멸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더 나은 것이 등장한다는 원리 속에서 시간은 순환이 아닌, 교체와 소멸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흐름의 첫 번째 희생자는 누구겠는가. 지금 남보다 뒤처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 바로 나와 당신이다. 말이 곧 생각이 되고, 생각은 다시 존재가 된다. 모든 것은 ‘말’로부터 탄생했다고 하지 않던가. 태초의 빛도, 바다도, 땅도, 우리도.
계절의 언어를 다시 가져보면 어떨까. 세계를 소유의 장소로 만들었던 언어를 버리고, 우리가 무엇과 관계 맺고, 무엇을 반복하며, 지속하길 원하는지,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를 말해줄 언어를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스마트폰을 치우고, 창을 열어본다. 찬 공기가 가슴 깊숙이 들어온다. 동네 할머니들이 통통해진 배추와 무를 뽑는다. 낮은 짧아졌고, 해가 저물면 공기 속에 쇠 냄새가 묻어난다. 밤이 깊어지자 잠에서 깨어난 올빼미가 날개를 펴고 동족을 부른다. 혹여 누군가 내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보려 한다.
겨울의 문이 열리는 날, 옆에 있는 이의 차가워진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날.
신유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