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나는 한국 고미술품의 매력에 깊이 빠져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놀라운 조형미를 두르며 빛나는 그것들에 매료되어 힘껏 수집했다. 이른바 고완품들이다.
이태준은 <무서록>(1941)에서 될 수 있는 대로 ‘골동’ 대신 ‘고완품’이라 쓰고 싶다고 고백했다. 어둡고 죽음의 흔적이 깃든 골동이란 이름보다는 운치 있고 멋이 깃든 고완품이 훨씬 부르기도 듣기도 좋다는 것이다. 내 수준에 맞는 고완품의 수집이란 신라와 가야의 작은 손잡이 잔과 목기, 주로 일상에서 사용되던 소품들이 주를 이룬다. 무명의 장인이 남긴 오래 사용해서 닳고 낡아 버려지려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매혹적인 색감이나 질감, 헤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들이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과도 같은 깊고 무수한 사연을 은닉하고 있다. 하여간 나는 아득한 사연을 지닌 고완품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들을 찾아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서재에는 고완품이 가득하다.
이태준은 고완품 수집에 대해 완물상지(玩物喪志·하찮은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큰 뜻을 잃음)를 두려워하면서 소장만 일삼아서는 과욕을 범한다고 우려했다. 완상이나 소유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古物)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기에 정말 고완의 생활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고완품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미술품 수집이란 그 작품을 빚은 작가의 정신, 감각을 체화하는 과정이고 거기에 신뢰를 보내는 일이다.
최근 미술품 컬렉터들이 이전에 비해 늘어나는 추이다. 세대가 바뀌고 당연히 수집문화도 달라졌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재력이 있는 젊은층의 증가가 눈에 띈다. 이른바 MZ세대가 그들이다. 이들은 외국 작가 작품을 중점적으로 수집하는 한편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의지해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구입에도 몰두하는 것 같다. 미술시장이 이들의 자금력과 취향에 견인되고 있는 듯하다. 시장의 판도가 반드시 작품의 질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돈이 되는 것들, 시장에서 잘 팔리는 것이 좋은 작품인 것처럼 왜곡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미술시장의 현실이다.
사실은 좋은 미술품 수집문화가 가능해지려면 화상의 올바른 역할이 우선되어야 한다. 피카소의 그림을 구입하고 입체주의 작가들을 처음으로 옹호했던 화상 칸바일러는 화상을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길을 터주어야만 하는 화가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화상은 이곳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시장에서 판매가 되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받아다 파는 구멍가게 수준의 주인들이 대부분이다.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우리 미술관의 가장 큰 문제는 소장 작품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열악한 재정에도 기인하지만 작품 선정 기준이 너무 낮다. 미술관은 진정으로 본보기가 되는 작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미술관이 아무 작품이나 가지고 있으면 대중을 착각하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요 작품들만을 엄선해서 구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작품의 위계도 생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미술관의 권위가 거의 없다. 날카롭고 적확한 안목과 기준이 아쉽기에 그렇다. 컬렉터들도 자신의 안목과 취향만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그림 보는 법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 있는 수집문화나 좋은 컬렉터가 나오기는 힘들다.
박영택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