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제일 좋았어?” 로스앤젤레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여정을 함께해준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의 낯빛이 복잡해 보였다. 좋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런가 싶었다. “다 좋았지.” 역시나 그랬구나 하고 안도하는 찰나,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는 ‘제일’이 어렵더라. 제일 좋은 거, 제일 마음에 드는 거. 왜 꼭 하나만 뽑아야 하는 거야?” 친구는 10년 넘게 대기업에서 일하다 몇년 전에 사직서를 제출했었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경쟁이 치열했을 것이다. 제일 좋은 것뿐 아니라 제일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늘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또다시 ‘제일’ 카드를 들이민 것이다.
‘제일’은 “여럿 가운데서 첫째가는 것”을 가리킨다. 비슷한 단어로는 갑, 가장, 으뜸, 일등, 첫째, 최고 등이 있다.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제일의 자리는 단 한 사람의 것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노력에 값을 매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한 사람만 남는다. 제일이 되기 위한 여정은, 제일을 찾기 위한 시도는 비단 TV 속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대화 속에서 우리를 시종일관 각성하게 한다. 제일 잘하는 것, 제일 좋아하는 음식, 제일 사랑하는 사람…… 취향을 뾰족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제일’을 가리는 것은 결국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줄을 세우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강연 때 ‘서바이벌’이란 시를 소개했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하나만 남았다/ 나만 남았다// 오늘부로 나는 우리라는 말을 쓸 일이 없게 된다.” 나만 남아서 행복한지 묻고 싶었다. 나만 남으면 정말 행복할지 고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부터가 여전히 제일의 늪에 빠져 있었다. 함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여러 개일 때 행복하면서도 나는 언제나 제일을 찾고 있었다. 무수한 경쟁을 거쳐 지금 여기에 당도한 이들에게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는 숨 쉴 틈을 앗아간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여전히 제일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게 유일한 답인 것처럼, 그 외의 선택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어떤 것 하나만 콕 집는 일은 나의 기호를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마음 가는 대상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도 해준다. 글을 쓰는 데는 적어도 ‘제일’이 도움 될 때가 있다. 제일 어울리는 단어를 고르고 제일 나은 방식으로 문장을 고쳐 쓸 수 있으니 말이다. 당장 제일 쓰고 싶은 것을 글로 쓸 수도 있게 한다. 한 편의 글은 무수한 취사선택을 거친 후에야 완성되니 말이다. 그러나 일상 곳곳에서 침투하는 제일은, 제일을 가려야만 하는 상황은 사람을 경직되게 한다. 어떤 게 가장 기억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굳이 하나가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제일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더 많은 추억거리가 쌓일 수 있다.
제일, 가장, 최고 등은 상대를 주저하게 한다. 좋았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아쉬웠던 부분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별로였던 것이 나중이 되어서야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위 매기기, 등수 정하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이 생활 속 깊이 들어선 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거기서 어떤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 내게 가르쳐준 것 중 하나는 경쟁이나 승부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나는 틈틈이 제일을 좇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항에 내려서 이동하는 길, 비행기에 오를 때 던졌던 질문을 바꾸어보았다. “두루 좋았지?” ‘제일’과 ‘두루’가 마치 ‘하나’와 ‘둘’인 것처럼, 그리고 인생의 완성이 빛나는 하루가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다 빛났던 하루하루에 있는 것처럼. 친구가 웃으며 답한다. “두루는 골고루니까. 두루 앞에서는 누구도 외롭지 않으니까.”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