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에서 내린 결정이 화를 부르거나 잘못된 결과를 낳았을 때, ‘만약 ~했더라면’ 가정해보고 후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에 ‘만약’을 붙이다 보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지 모른다. 가정에 가정이 더해져 인과관계의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가정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분석하는 데 가정법만큼 유용한 도구는 없다. 부질없는 상상만은 아닐 수 있다. 이미 지난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더라도, 미련과 후회에 그치지 않고 앞날을 위한 상상적 재구성이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가정일 뿐이지만, 허구적 상상이 새로운 미래를 펼칠 수 있다. 완료된 역사의 인과관계를 따져보고,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여 성찰하다 보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도가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 파도 끝없는 김건희 명품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특별감찰관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부패의 늪에 빠질 수 있었을까. 정말 거리낌 없이 받아 챙기고 인사나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을까.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물적 증거 앞에서 수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대가성도 없고 청탁도 아니고 직무 관련성도 없다고 우긴다. 그에게 ‘사회적 예의’를 차려야 했던 이유가 뻔한데도 청탁의 대가는 아니라고 한다. 건넨 사람들은 다 잘되었다. 공직도 얻고 공천도 받고 당대표로 선출되고 이권도 챙겼다. 김건희씨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칭했지만, 누가 힘없는 사람에게 값비싼 명품을 선물하겠는가. 공적 권한이 없는 김씨가 국정은 물론 여당 경선과 공천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말해주는 정황은 차고 넘친다. 대통령인 남편이 몰랐을 리 없다. 폭탄주나 마시며 국정에 손 놓고 있었다 하더라도, 검찰 총수까지 지냈는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한창 ‘김건희 라인’ 등 측근과 친인척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불거지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정 쇄신 방안으로 특별감찰관 임명을 언급한 것을 보면 부인의 행태를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도 눈감았을 가능성이 크다. 형법상 용어로 ‘암묵적 의사의 상통’이 있었을 것이고, 뇌물수수의 공범이 틀림없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 야당이었던 국민의힘은 특별감찰관 임명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작 정권교체에 성공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측근 감찰 기구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윤석열 사단’이 법무부와 검찰을 장악하니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검찰이 특별감찰관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대통령이나 여야 모두가 미적대는 사이 김씨와 그 주변에서 측근을 자처하며 공적 지휘 라인과 직무 범위를 뛰어넘는 국정 관여와 인사 개입이 은밀히 자행되고 있었다.
특별감찰관은 박근혜 정부 때 법이 통과되어 임명된 적이 있고, 권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은 성과도 있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위행위와 직권남용, 가족회사 관련 횡령과 탈세 사실 등을 감찰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신설되었으니까, 특별감찰관제도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친인척 등 대통령과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의 비위행위에 대한 감찰 장치는 많을수록 좋다.
권력형 비리와 직권남용 행위를 방지할 수 있는 독립적 반부패 시스템은 거미줄처럼 촘촘해야 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특별감찰관 임명을 꺼린 것을 보면 반드시 있어야 할 권력 감시 기구임은 분명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권력은 권력을 가진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견제를 받는 것이 좋다”며 “되게 불편하겠지만 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특별감찰관 임명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국회는 김건희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시라도 빨리 특별감찰관 임명을 위한 절차에 착수해야 한다. 특별감찰관은 9년째 공석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