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에 지어진 영국 런던 외곽 펍에서 김치 요리를 메뉴로 내놓았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펍 외관. 김치 요리, ‘덴푸라 김치’가 적혀 있는 메뉴판.
최근 영국 런던 외곽의 한적한 마을 리치먼드를 찾은 오인수씨(49)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펍에 들렀다가 김치 메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1770년에 지어진 선술집에서, 영국 대표 펍 메뉴인 피시앤드칩스와 함께 김치 요리를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 이름은 ‘덴푸라 김치’. 코코넛 요거트, 미소 타히니 소스, 절인 긴디야 고추를 곁들였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한식 김치에 일식 튀김 ‘덴푸라’, 스페인 고추 ‘긴디야’, 중동 참깨 소스 ‘타히니’ 그리고 일본 된장 ‘미소’까지 지구촌의 온갖 맛을 갖다 붙인 것이다. 어떤 요리인지 식당 직원에게 묻자 “영국인 셰프가 김치를 활용한 요리법을 알아와 신메뉴로 만들었다”며 “강력 추천 메뉴”라는 답이 돌아왔다. 주문해서 맛을 보니 간단히 말해 김치에 튀김가루를 입혀 튀겨낸 요리였다. 함께 제공된 다양한 소스도 찍어 먹을 수 있었다. 오씨는 “바삭하게 부친 김치전 맛이었다”며 “250년 역사의 영국 선술집에서 한국 퓨전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고 말했다.
한류가 세계인의 식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식당과 아시안마트 진열대에 머물던 한식은 이제 전 세계 대형마트 진열대를 차지했다. 한식당은 세계 각국 미식가들이 줄 서서 먹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현지 유명 레스토랑은 물론 KFC 같은 글로벌 프랜차이즈도 한식의 매운맛을 재해석한 퓨전 메뉴를 내놓고 있다. 2025년 전 세계를 홀리고 있는 한식 열풍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글로벌 대형마트· 레스토랑 점령한 K푸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출시된 KFC 한정판 <오징어 게임> 메뉴(왼쪽)와 싱가포르 KFC ‘불닭’ 메뉴. KFC 홈페이지
미국에 16년째 거주하고 있는 이석형씨(46)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한인마트에 가야 한식 재료를 구할 수 있었는데 이제 미국 현지 대형마트 어디를 가든 한국에서 수입한 식품을 구할 수 있다”며 K푸드 인기를 실감한다고 했다. 현재 코스트코, 월마트 등 미국 주요 마트에서 비비고, 풀무원, 농심, 삼양 등 한국 식품 브랜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K컬처의 인기에 힘입어 북미 한식 냉동식품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영국·유럽 지역에서도 불닭볶음면, 신라면, 김치 등 한국 식품을 대형마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세인즈버리·코스트코를 비롯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한국 식품 브랜드 유통망이 빠르게 확장 중이다.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 등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서도 국내 식품기업들이 현지 주요 슈퍼마켓 체인에 대거 입점하며 한식의 글로벌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멕시코시티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 소리아나는 지난해 8월부터 매장 내에 ‘K푸드 존’을 따로 마련했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국 식품(농식품 연관 산업 포함) 수출액은 약 130억달러로 전년 대비 6.1% 증가해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품목별로는 라면, 쌀가공식품, 신선식품 수출이 두드러졌다. 특히 김치 수출액은 1억6000만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세계에서 한식은 새로운 ‘미각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K푸드를 접목해 색다른 맛을 선보이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올여름 스페인을 여행한 김지연씨(29)는 현지 KFC 매장에서 ‘오징어게임’ 에디션 메뉴를 발견했다. 김씨는 “핑크색 빵에 빨간 소스가 들어간 치킨버거였는데, 매콤한 맛 덕분에 버거의 느끼함은 덜하고 풍미는 살아났다”고 말했다. 실제로 KFC 유럽 법인은 올해 넷플릭스와 손잡고 <오징어게임> 한정 메뉴를 스페인, 폴란드 등에서 선보였다. <오징어게임>의 상징색인 핑크색 번에 한국식 바비큐 글레이즈를 입힌 버거와 한국식 치킨 등을 메뉴로 내놓았다. 싱가포르 KFC는 올 2월 한국 삼양식품의 ‘불닭’ 브랜드와 협업해 삼양 불닭 치킨과 더블 다운 샌드위치를 출시했다. 불닭의 매운 양념을 접목한 메뉴로, 불닭 샌드위치는 치킨과 불닭면을 그대로 사용했다.
글로벌 브랜드뿐 아니라 현지 외식업계 전반에서 ‘K푸드 퓨전’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 사는 레일리 후세일리(20대)의 최애 메뉴는 ‘김치 토핑 치즈버거’다. 그는 런던 홀본역 근처의 작은 버거 가게에서 구운 김치 토핑에 치즈를 녹인 버거를 맛본 뒤로 K퓨전버거 맛에 반했다. 후세일리는 “매운맛이 강하지 않고, 치즈버거에 샐러드를 넣은 것처럼 상쾌한 맛”이라고 평했다. 미국에서는 한식의 고급화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뉴욕 직장인 오은영씨(47)는 “요즘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최고 인기”라며 “정통 한식의 맛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외국인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다”고 했다.
K푸드 틈 노리는 ‘짝퉁 한식’ 경계해야
영국 대형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코리안 스타일’ 푸드.
한식의 이름도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고 있다. 스시가 아닌 김밥, 덤플링 아닌 만두, 라멘 아닌 라면이 세계 식탁을 채우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한식의 정체성과 고유한 맛이 온전히 자리 잡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계 미국인인 대니 유(49)는 “굳이 한식이 아니어도, K문화가 워낙 유행하다 보니 한국식 인테리어를 한 카페나 음식점에서 흔한 빵이나 샌드위치를 내놔도 잘 팔린다”고 했다. 그는 “예전보다 한식의 인기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에서 중식이나 일식처럼 주류 음식으로 자리 잡은 느낌은 아직 아니다”라며 “한때 ‘반짝’하는 유행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한식 붐에 편승해 ‘퓨전’을 가장한 ‘짝퉁 한식’도 빠르게 늘고 있다. 영국에서 유학 중인 김나윤씨(19)는 최근 현지 마트인 테스코에서 ‘코리안 스타일 롤’을 구매했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김밥을 기대했지만, 치킨 롤 위에 마요네즈와 칠리소스를 얹은 초밥에 가까운 메뉴였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은 그냥 매운 소스만 들어가면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붙이는 제품이 많다”며 “이탈리아인이 한국의 고구마 피자를 보면 당황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음식에 ‘코리안’ 이름을 붙이는 사례도 흔하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이예다씨(42)는 “유명 스페인식 해산물 식당 메뉴에 뜬금없이 ‘코리안 BBQ’가 있어 놀랐다”며 “중국인이 운영하는 ‘무늬만 한식당’도 많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한글 상표’를 붙인 중국산 식품이 늘고 있다. 일본 주부 안도 마사키(62)는 “슈퍼에서 한글이 적힌 당면과 고춧가루를 한국산으로 알고 샀는데, 알고 보니 중국산이었다”며 “과거 중국산 식품 사고가 잦아 더욱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 시판 삼계탕 제품의 상당수는 브라질산 닭고기를 사용하며, 한국식 조리법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한글 상표’ 중국산 식품. 안도 마사키 제공
최근 한식진흥원과 유럽 한식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장을 다녀온 미슐랭 1스타 식당 ‘윤서울’의 송홍윤 헤드셰프는 “이제 세계 어디에서든 한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은 요리사로서 매우 자부심이 느껴지는 일”이라면서도 “다만 한식이 잘못 전달되는 사례에는 방어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짝퉁 한식’이 한식 이미지 전체를 해칠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송 셰프는 “(짝퉁 한식이) 어떤 나비효과로 한식의 이미지를 깎아내릴지에 대한 걱정이 크다”면서 “한식뿐 아니라 세계 각국 외식업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국 자본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가 차원의 한식 유통망 관리와 지원책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