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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비우는 겨울

입력 2025.11.16 21:43

들판이 순식간에 속살을 드러낸다. 추수 마친 검은 논바닥을 홑이불처럼 덮었던 볏짚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공룡알로 변태되며 싹쓸이당했다. 느릿하게 보이던 수확 작업도 거의 마무리되고 사람의 손끝이 필요한 갈무리가 남았다. 털고 때리고 모으고 쟁이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겨울 휴식이다. 보통은 두 달 남짓, 김장 마치고 이듬해 입춘까지는 농한기를 보낸다. 옛날 같으면 사랑방에서 새끼 꼬고 화로에 고구마 꽂아두던 그때다. 새끼 안 꼬아도 된다고 해서 놀거나 자빠져 있기를 즐기는 농민은 없다. 과일나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화목난로를 때는 집은 쉴 새 없이 나무도 마련해야 한다. 양파 마늘밭도 손길을 부른다.

이민 가듯 서울을 떠난 뒤 열다섯 번째 맞는 겨울이다. 매년 겨울이면 프로야구 선수들 동계훈련하듯이 몸도 만들고 체력도 키워서 봄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품는다. 많은 시간을 채웠던 노동을 운동으로 교체하려는 계획도 세운다. 메모지를 붙이며 다짐을 상징하고, 화엄사 계곡을 탐색하기도 하고, 읽고 싶던 책도 주문해 쌓아놓곤 한다.

아쉽게도 국민학교 1학년 방학 이후 모든 계획표는 나와 궁합이 안 맞았다. 계획을 짜는 것까지만 좋아했지 싶다. 올겨울도 한결같이 계획과 각오를 반복하고자 한다. 나이 60줄에 들어서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일 치를 수 있다는 충고를 듣는다. 너무 안 변해서 아직도 이 모양이지만.

일단 그 흔한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자. 미국 통계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하루에 평균 2617번 터치하면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데만 2시간30분을 소비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TV, 오디오, 컴퓨터 등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며 보내는 시간은 평균 11시간6분이란다. 하루의 절반에 가깝고 깨있는 시간의 3분의 2를 그렇게 쓰고 있다. 미국 사람들 얘기로 치부할 게 아니다. 우리나라가 덜하진 않을 게 뻔하다. 서너 가지 SNS에서 울려대는 신호음에 하던 일도 멈추고 반응한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호구들이다. 얼마 전 모든 알람을 껐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폰 대신 책이다.

그다음으로는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저장강박증이 있는 미니멀리스트에 가깝다. 의지는 명확하나 증세가 좀 더 심한 탓에 뜻대로 살지 못하는 편이다. 게다가 필요한 것 외에는 소비를 지양하고 필요하더라도 두세 번 더 생각한 뒤 구입하는데 대부분 ‘필요’가 이기는 쪽이다. 구입 후 1년간 포장을 뜯지 않은 것도 있고, 같은 것을 두 번 사는 경우도 있다. 별수 없다. 생필품을 제외한 신제품 구매를 일시정지하기로 한다. 뭔가 사고 싶어 손이 떨리기 전까지 한시적이다.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따뜻한 책을 선물받았다. 어려운 곳에서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분들의 이야기였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쌀밖에 없어요” 말씀드리니 쌀이 필요한 곳을 연결해주셨다. 농사지으면서 농산물로 기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 작년보다 조금 늘어난 수확물을 나눌 계획이다. 쌀이 부족한 곳을 찾고 있다. 겨울 동안 추운 이유가 기온만이 아닌 사람들을 찾아보려 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했다. 덜어내고 줄이며 살아가라는 말일 터. 나누고 비우는 겨울이 기다리면 좋겠다.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이장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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