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1’ 옆에 마치 실수로 인쇄된 듯 보이는 또 다른 ‘1’. 손가락 열 개를 채우고도 하나가 남는, 인심 좋은 숫자 11. 실수를 저질러도 왠지 한 번 기회를 줄 것 같은 안도의 숫자 11. 아직 한 달이 더 남았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한 11월. 게으른 인간의 마지막 보루.
스무 살 노동, 어떻게 위협받는가
“12년의 입시가 종료되는 날이네요. 차분히 문제를 풀고, 끝나면 마음껏 기쁨을 누리세요.” 아침 라디오 DJ의 반복적인 응원과 격려를 듣고서야 11월에 수능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수능, 인생엔 그보다 몇 곱절이나 힘든 고통이 있다는 걸 체험한 후, 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만 아주 사소한 이벤트. 음, 쓰고 보니 ‘인생 별거 아냐’ 하는 종류의 허세 가득한 소회인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오늘은 지우지 않는다. 수능 당일 SNS에서 보았던, ‘제발 수능 못 쳐도 인생 망한 거 아니라고 해줘요’란 어느 청소년의 절박한 요청에 답을 보태고 싶어서. 학교 밖에서 11월을 맞았던 열아홉의 나 역시 ‘인생은 그리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증언을 수집하고 있었다.
최근에 본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증언을 수집 중인 한국의 모든 열아홉을 위한 영화다. 작품에 등장하는 경인하이텍고등학교 학생들은 고3 마지막 학기를 취업 상담과 공장 실습으로 바쁘게 보낸다. 작품의 주인공인 창우는 대학과 병역을 해결해준다는 중소기업의 제안에 취업을 결정하며, 졸업도 하기 전에 학생에서 노동자로 신분을 갈아끼운다.
창우가 공장으로 첫 출근을 시작할 때, 관객은 관습대로 뉴스를 통해 보았던 현장실습생의 안전사고와 부당한 대우들을 예상하게 되지만, 영화는 그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며 창우의 소박한 일상을 건조하게 관찰해나간다. 창우는 성실하게 출퇴근을 반복하며 여느 ‘신입’이 겪는 시행착오를 온몸으로 통과하고, 창우와 함께 공장에 입사한 동기 우재, 성민, 다혜 또한 각자의 방식과 특질대로 노동에 적응한다. 도중에 우재와 성민이 실습을 멈추고 공장을 떠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배달 일을 선택하지만, 카메라는 그들의 선택을 낙오로 규정하지 않고 중립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인간이 어떤 노동을 하더라도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관철한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고저 없는 플롯과 관찰자 시점의 촬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급진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까닭은 뉴스에서만 호명되던 현장실습생이라는 존재에 평범한 일상을 부여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태도에 있다. 카메라는 일하는 창우의 모습 뒤로 안전하지 않은 노동 환경, 원가 절감을 위해 타협을 부추기는 자본, 그것을 감독하며 인권을 장악하는 권력을 배경처럼 비춘다. 여기서 작품은 그 배경을 확대하지 않고, 다시 창우의 노동이 만드는 일상의 풍경을 담는 것에 전념하는데, 이것은 관객에게 창우의 평범한 일상이 무척 사소한 것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잃었던 수많은 미성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복원시키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망하지 않는 젊음을 위하여
<3학년 2학기>가 인천을 배경으로 실업계 고등학생들의 졸업 이후의 삶을 다룬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고양이를 부탁해>(2001)와 맞닿게 한다. 인천여상을 졸업한 다섯 명의 동창 지영, 태희, 혜주, 비류, 온조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로 다른 삶을 살며 예전 같은 우정을 이어가지 못하지만, 대학 졸업장이 안정적인 삶의 전제 조건인 사회 구조는 이들에게 다시 비슷한 불안을 안긴다. 2021년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에서도 그리고 있는 이 열아홉의 불안은, 수능과 대학 진학이라는 학업적 궤도를 이탈한 미성년들이 어떤 사회적 소외와 차별을 겪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가혹한 ‘무관용’의 세계에서 무너지는지를 계보로서 설파한다.
대학 입시는 여전히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보여주듯 우리 사회의 열아홉에게 더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져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무궁무진한 실패의 기회와 안전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만약 그 기회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수능은 어디까지나 10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이용되는 하나의 조작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인생에 있어 대학 입시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때’는 모두에게 다르게 찾아온다는 걸. 다만 그들은 수능 점수를 잘 받아 명문대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약간의 수월함에 지나친 가산점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수능 대박’을 외칠 때, 시험을 치르지 않은 당신은 어떤 하루를 보냈나? 조금은 우울했겠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당신의 미래를 조금도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복길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