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폭염 반복…생존 위험 노출
구조대 모집하는 글에 너도나도
초등생·대학생 ‘물결’처럼 번져
작은 관심이 생태 정의 교육으로
지렁이 구하기 대작전 팀원의 구조 활동 모습. 김희수씨 제공
“비가 내린 날에는 평균 10마리 넘게 구해요. 비가 오지 않아도 촉촉한 길 근처나 보도 위에는 지렁이가 많이 있지요. 편의점을 가거나 산책을 할 때도 한두 마리씩은 꼭 구하는 편입니다.”
경기도에 사는 30대 활동명 ‘어년’씨는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 지렁이 구조 대원이다. 그의 활동 시기는 매년 6~9월 한여름, 구조는 혼자서 한다. 구조 장비는 나뭇가지 하나뿐이지만, 10초만 품을 들이면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여름철 길가에 흔한 지렁이는 쉽게 죽는다. 땅속에 살던 지렁이는 비가 오면 물이 차 숨쉬기가 힘들어져 밖으로 나온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볕이 내리쬐면 열기에 몸이 말라 죽는다. 극한 폭우와 폭염이 반복된 지난여름 날씨는 지렁이에게 치명적이었다. 흙을 찾아가는 길에 사람의 발이나 각종 바퀴에 밟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지구대가 홍익대 캠퍼스에 설치한 지렁이 구조 도구함. 김희수씨 제공
지렁이가 사라진다면 도심 생태계는 중요한 ‘토양 엔지니어’를 잃게 된다. 지렁이는 땅속을 헤집어 식물 뿌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길을 낸다. 흙 속 유기물을 먹고 영양분이 가득한 분변토를 만들어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러나 누군가 손을 내밀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늘어져 있는 지렁이를 흙이 있는 그늘진 곳으로 옮겨놓아 주기만 하면 된다. 어년씨는 “지렁이 구조는 ‘길 위에 있는 지렁이를 흙 위로 옮긴다’라는 아주 쉬운 행동이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년씨가 개인 블로그에 올린 구조대 모집 게시글에는 동참하겠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어년씨의 활동을 지켜본 주변 지인들도 구조 활동에 나섰다.
지난여름에는 조직적인 ‘구조대’ 활동도 활발했다. 지렁이 구조대 ‘꿈틀단’ 소속 김지연씨는 여름 내내 땅바닥을 보고 다녔다. 김씨는 “보도블록에 딱 끼어 있는 아이들은 더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 유심히 보게 된다”면서 “틈에 끼인 아이들이 있으면 나뭇가지로 집어 흙이 있는 곳으로 옮겨준다”고 말했다.
지렁이 구조대 모집글 어년씨 제공
김씨가 속한 꿈틀단은 지난 6월 서울환경연합에서 모집한 ‘지렁이 구조’ 모임이다. 55명가량이 구조 활동을 벌여 지난 6월30일부터 8월14일까지 최소 200마리 넘는 지렁이의 목숨을 구했다. 윤서연씨(25)는 “지렁이 구하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이들도 있는데, 누군가의 구조 활동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작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가에서도 지렁이 구조 활동은 작은 물결처럼 번졌다.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4학년 학생 5명은 지난 6월부터 ‘지렁이 구하기 대작전’(지구대) 팀을 꾸려 지렁이 구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캠퍼스에 지렁이 구조 도구함 2곳과 임시 보호소를 마련했고, 틈틈이 구조 활동 사진을 SNS에 올리며 소식을 전했다. 학생들의 반응에 힘입어 지구대는 지렁이 구조 열쇠고리(키링)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화여대 환경교육연구실은 예비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생태 감수성 향상 프로그램에 지구대 팀을 초청해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을 기획한 엄세원씨(31)는 “‘세상에 작은 생명체에 관심을 가지는 게 너뿐만이 아니야’라는 생각의 공감대를 얻고 함께 활동할 에너지를 얻고자 워크숍을 열었다”며 “모든 생명체를 위하는 마음, 생태 정의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을 꾸준히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들도 죽어가는 지렁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인천 도담초등학교 4학년 학생 90명과 대구·통영 등 타 학교 14개 학급 학생들은 지난 6월부터 지렁이 구조 활동을 벌였다. 이준서군(도담초 4학년)은 “지렁이는 아무 대가 없이 우리 땅을 좋게 해주는데 말라 죽거나 밟혀 죽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며 “어른들도 동물이나 곤충에 관심을 기울여주고, 길에서 죽어가는 동물을 구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