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발언 철회 요구하며 연일 공세
대만 문제 절대로 밀리지 않겠다는 인식
2012년 닮은꼴이나 반일감정 자극 자제
사람들이 전승절 80주년 기념 화단이 설치된 베이징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2025년 9월 1일 촬영. 박은하 특파원
중국 외교가에 공격적인 외교 스타일을 뜻하는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가 돌아왔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 개입’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중국은 외교적 수사와 경제적 보복조치를 병행하며 일본을 압박하고 있다. 2012년 일본 정부의 센카쿠열도 국유화로 불거진 중·일갈등 시기와 닮은꼴이다. 다만 국제여론을 인식하는 면에서는 과거보다 정교해졌다.
중국 외교 당국자들은 17일 소셜미디어에서 일본을 겨냥한 외교적 압박을 이어갔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엑스에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의 담화 영상을 올렸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엑스에 “중국 인민의 바텀라인(한계선)을 도발하려 한다면 반드시 격렬한 반격을 받아 14억 넘는 인민들이 피와 살로 쌓은 강철의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고 일본어로 글을 올렸다. 린 대변인은 또 다른 게시물에서는 영어로 일본의 영토를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4개 섬과 부속도서로 규정한 포츠담 선언의 내용을 올렸다.
‘강철의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란 표현은 중국에서는 외세에 맞서겠다는 결기를 드러내는 용도로 종종 사용된다. 표현 수위는 높지만 중국이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다는 점을 부각한 표현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연설에서 “중화민족이 괴롭힘을 당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전랑외교는 중국 정부·공산당에 대한 비판에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대응하는 형태의 외교다. 중국 애국주의 액션 영화 <전랑>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의 경제·군사적 성장과 중화민족주의 고조를 바탕으로 등장했고 전 세계적으로 반중 정서가 극심했던 코로나19 대유행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2023년 중국이 대외 이미지 관리에 나서면서 전랑외교는 자취를 감췄다.
전랑외교를 다시 불러낸 것은 대만 유사시 자위대가 무력 개입할 수도 있다는 다카이치 총리의 지난 7일 발언이었다. 그 발언 직후 쉐젠 주오사카 중국 총영사가 ‘더러운 목을 베겠다’고 극언하면서 공격적 외교 재개의 신호탄을 쐈다.
개별 외교관의 발언은 나오지 않고 있다. 쉐 총영사 발언이 역효과를 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프랑스 라디오방송 RFI는 앞서 쉐 총영사의 발언을 두고 “주재국 지도자의 폭력적 언사”라고 표현하며 “(다카이치 총리 발언 철회를 거부하는) 일본의 대응은 중국의 전랑외교를 더는 용인할 수 없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달한다”고 보도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국제문제 논평 코너 ‘종성’에서 “다카이치 사나에의 대만 관련 허위 발언은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적, 사회적, 전략적 관점이 매우 잘못되고 위험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며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전략적 방향에 대해 매우 경계해야 한다”고 전했다.
중국이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발언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는 과거 일본의 대만 식민지배가 오늘날 양안 문제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역사 인식이 있다. 한국과 미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 발표, 미국·필리핀의 남중국해 군사 훈련 강화 등 중국의 안보 환경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대만 문제마저 밀리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경제적 보복 조치도 강화하고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날 베이징의 주요 여행사들은 일본 여행상품 판매를 아예 중단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이 위험하다며 일본 여행과 유학 자제를 권고한 것에 보조를 맞춘 조치다. 항공사들도 올 연말까지 일본행 항공권 취소·변경에 수수료를 면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대중적으로 반일기류가 일어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이날 개봉 나흘째를 맞은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이 4억위안(약 822억원)의 기록적 흥행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홍콩 명보는 선전에서는 지난 주말 기모노와 일본도 차림의 코스프레를 하고 영화관에 온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다만 영화 상영 지속 여부는 불투명하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일본 영화의 신규 개봉은 막았다. 17일 개봉 예정이던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초화려! 작열하는 떡잎마을 댄서즈>와 <일하는 세포>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고 중국 언론들이 전했다.
중국 최대 포털 바이두에서는 온종일 ‘다카이치 총리가 일본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 외무성 고위 관리가 오늘 중국을 방문한다’ ‘일본 민중들은 중국인 관광객이 오지 않아 타격이 크다고 말한다’는 등의 실시간 검색어가 올라왔다. 실시간 검색어 내용을 종합하면 다카이치 정권이 일본 국민의 뜻에 반해 ‘대만 유사시 자위대 개입’ 발언을 했으며 일본 정부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중국 정부의 행보는 과거 전랑외교나 후쿠시마제1원전 오염수(일본명 처리수) 방류 국면의 부작용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관들이 거친 언사를 사용하며 상대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전랑외교 역시 중국에 대한 반감만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이 있었다. 후쿠시마제1원전 오염수(일본명 처리수) 방류 이후 반일감정이 극대화되면서 지난해 일본인 초등생이 피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 베이징 교민은 “중국인들도 정치적 문제와 대중문화 콘텐츠를 연동하는 것에 반감이 있다”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때에도 현대차를 불태우는 시위 영상이 번지곤 했지만 지금은 중국인들도 시각이 좀 달라졌다. 그런 것은 촌스럽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반일운동이 일본요리 불매운동으로 불거지면 자국 자영업자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국이 센카쿠열도 국유화와 달리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은 철회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일본이 물러설 때까지 압박하며 2012년 센카쿠열도 국유화 당시 꺼냈던 희토류 수출통제 등의 카드를 다시 꺼낼 가능성이 있다. 국제 여론을 살피면서 수위를 조절하되 압박을 멈추지 않는 신전랑외교를 구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이달 말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리창 총리와 다카이치 총리의 면담이 예정에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