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불쾌하고 불편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입법 만능주의는 오히려 법을 통해 복원하려 하던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논란이 된 반중 집회를 계기로 특정 집단에 대한 모욕과 명예훼손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특정 국가, 특정 국가의 국민, 특정 인종의 명예를 모욕하고 훼손한 자”는 형벌에 처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 개정안은 혐오 표현, 집회 구호 등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배경으로 제안된 것으로 현행 형법상 피해자를 특정인으로 한정한 것을 “특정 국가와 국민 그리고 인종” 등 집단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혐오 표현을 법적으로 강하게 금지할 경우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공공 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하는 시민의 능력 자체가 약화할 위험이 있어 이 법안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혐오 표현은 물론 그 자체로 불쾌하고 혐오스럽다. 사람들은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욕설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을 많이 한다. 그러나 욕설은 단순히 나쁜 말이 아니라 언어와 감정, 사회 질서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화적 현상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소통하지만 동시에 감정의 폭발을 언어로 방출하기도 한다. 욕설은 바로 그 감정의 언어적 배출구이며, 사회가 감정을 규율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욕설과 마찬가지로 혐오 표현이 범람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문화 현상인 욕설을 법으로 없앨 수 없는 것처럼 법으로 규제한다고 혐오 표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욕설과 혐오 표현의 원인인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줄이는 것이 해법이다.
이러한 혐오 표현의 법적 규제를 두고 한쪽에서는 언어폭력을 처벌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기에 사람들은 헷갈린다. 특히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두 정당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까닭에 국민은 대체로 배후의 정치적 의도와 이해관계를 의심하여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 이 시점에 혐오 표현을 처벌하는 형법 개정안인가? 계기는 분명하다. 반중 집회에서 ‘짱개, 북괴, 빨갱이는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져라’라는 가사가 포함된 노래를 부르며,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했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게 무슨 표현의 자유냐, 깽판이지”라며 강력하게 조치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모든 혐오 표현은 정말 국가공동체를 해치는 심각한 반사회적 행위로 처벌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핵심 요건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혐오 표현을 허용해야 하는가?
한국의 혐오 시위는 ‘상징적 전투’
독일 나치즘을 온몸으로 경험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혐오 표현을 질타하면서도 혐오 표현의 법적 규제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의 절대적 조건은 ‘다수성’이다. 서로 다른 취향과 의견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와 다수성이 민주주의의 핵심적 전제조건이다. 아렌트에게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이 의견을 표출하는 권리만이 아니라, 다수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다. 다원적 목소리,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의 정치적 삶이 가능하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이러한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이 서로 마주하고 세계를 같이 구성해가는 공간에서 필수적이다. 말하기의 자유 없이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가 보이지 않고,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혐오 표현은 바로 이 다수성이 작동하는 조건을 위협할 수 있다.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경멸하는 폭력적 언술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 영역을 넘어 공공 공간에서 타자를 제압하고 배척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혐오 표현은 어떤 집단을 ‘정치적 파트너’로서 동등하게 마주하는 관계를 거부하거나 회피한다. 혐오당하는 집단이 더 이상 자유롭게 나타나거나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사회와 공동체는 편향되고 왜곡된 채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 혐오 표현이 지속되면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은 위축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혐오 표현은 단순히 개인적 감정의 분출로 끝나지 않고 다수성을 해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는 왜 혐오 표현을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 혐오 표현이 특정 집단을 배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요건인 다수성을 해친다면, 혐오 표현에 대한 법적 제재는 민주주의의 절대적 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다수성이 작동하는 정치의 전제이다. 따라서 설령 혐오적 색채가 있는 발언이라 할지라도, 전면적인 사전 검열이나 발언 차단보다는 먼저 그 발언이 공적 토론의 장에서 제시되고, 비판과 반대 입장이 가능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조건을 살리는 길이다. 따라서 혐오 표현이 공론장에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하지만, 그 발언이 다수성이라는 조건을 침해하는 방식이라면 제한되어야 한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과 혐오 표현이 초래할 수 있는 다수성 파괴의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
설익은 말 금지는 자유를 잃는 것
여기서 우리는 집권 여당의 입법 취지에 강한 의심이 든다. 혐오 표현의 형법적 제재가 표현의 자유에 끼칠 영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예를 들면서 인종, 종교 혐오 표현에 대해 형사처벌이 일반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과 다르다. 나치 시대의 인종 증오와 선동 경험을 가진 독일만 혐오 표현을 민중 선동죄로 강력하게 규제하고, 다른 나라들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과도한 규제를 자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 연방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 수준으로 보호하며, 내용이나 관점을 기준으로 한 정부 규제를 강하게 금지한다. 간단히 말해 미국 연방법에는 일반적 ‘혐오 표현 금지법’이 없다. 표현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보호되고, 단지 직접적이고 임박한 불법행위를 선동하거나 진정한 위협이 있을 때만 제재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되는 반중 집회가 형법으로 제재해야 할 정도로 직접적으로 폭력을 선동하는가? 최근 몇년간 한국의 거리 시위는 ‘살벌하다’는 인상을 자주 준다. 현장에선 “정권 타도!” “○○은 국민의 적이다!”와 같은 공격적 구호가 난무한다. 한때 광화문 시위와 서초동 시위 현장을 참여 관찰한 어느 독일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위 구호만 보면 곧 칼부림이라도 나고 폭력 행위로 폭발할 것 같은데 두 곳 모두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게 너무 이상했다.” 그 학자는 한국 시위를 “상징적 전투”라고 표현하며, 그 속의 분노와 과격한 언사는 정치적 감정의 표출이자 의례화된 의사소통 형식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시위는 ‘언어의 폭력성’과 ‘행위의 평화성’이 분리된 매우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살벌한 구호는 폭력의 전조가 아니라 행동으로 폭발하지 않기 위한 언어적 방출구이다.
국제인권기구는 이러한 긴장을 법적으로 정교하게 구분하기 위해 ‘라바트 테스트’(Rabat Test)를 제안했다. 단순 혐오 표현과 선동적 증오와 폭력 행위의 선동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폭력 또는 적대행위로 이어질 직접적 위험이 없다면 대화와 토론이 우선되고 표현의 자유는 적극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의 반중 집회에서 중국인에 대한 직접적이고 임박한 폭력을 선동하는 행위가 있었는지 의심된다. 불쾌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 위험한 말은 아니다. ‘불쾌한 관점’을 선별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사상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다. 관점 차별은 표현의 자유를 잠식할 뿐 아니라 정치적 소수의 발언권마저 억압한다. 혐오 표현의 규제는 폭력적 행위나 직접적 위협의 범위로 한정되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살벌한 말을 만들어낸 것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치권이 아닌가? 살벌한 말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는 위험해 보이지만, 살벌한 말이 금지된 사회는 어쩌면 이미 자유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