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7일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팩트시트(설명자료)와 한·미 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북한은 며칠 뜸을 들인 후 ‘변함없이 적대적이려는 미·한 동맹의 대결 선언’ 제목의 날 선 논평을 냈다.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아니라, 조선중앙통신 논평 형식이라는 점에서 수위를 조절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이 대화의 문을 잠근 상태에서 당분간 남북관계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행동은 유리한 국제전략적 환경을 조성했고 전략적 지위도 변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4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밝히며, ‘전략적 관망’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북한과 러시아는 포괄적 동맹을 맺고 장기화를 모색 중이다. 이미 전투병, 건설병, 교체 병력 등 1만명 이상의 북한군을 러시아에 보냈다. 한편, 수많은 북한 병사 사망에 정치적 채무를 진 러시아도 북한에 민감 기술 이전, 산업 설비 지원, 식량과 정제유 공급을 하고 최근 제11차 북·러 경제공동위원회를 개최해 향후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북·러관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지원은 북한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구조적 한계가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지금과 같은 양국 관계의 강도도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이라도 북한은 일시적으로 소원해졌던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9월3일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항일 전승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6년 만에 북·중 정상회담을 열었고, 리창 총리도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에 참여해 양국의 실질적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특히 9월28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이례적으로 ‘실질적 협조’를 강조하면서 손에 잡히는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북·중 교역이 빠르게 증가했고 평양~베이징 여객열차와 육상 우편 운송로가 열렸으며, 완공 이후 10여년 방치되었던 신압록강대교도 개통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뒷배를 확인하고 내부 잠재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북·미 대화에 조급하게 나설 유인이 크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핵국가(nuclear power)로 부르고 대북 제재 해제를 언급하면서 대화를 요청하고 있지만, 북한은 비핵화를 포기하지 않으면 마주 앉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버텼다. 문제는 북한이 모든 대화채널을 닫은 상태에서 남북관계는 더욱 돌파구를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과거 북한은 조건을 걸고 남북 대화에 나왔지만, 현재는 조건 자체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미 한국의 대북 단체에 대한 접촉 금지령을 내렸고 통일 관련 조직과 부서를 없앴으며, 통일포기론에 대한 북한 주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 선전전을 강화하는 등 내치 모드로 전환했다.
남북 대화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북한은 설득보다 대내외 환경 변화에 따라 대화 테이블로 나왔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한반도의 판을 흔들 수 없다면 흔들리는 판을 정밀하게 포착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4월 중국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날 계획을 밝힌 바 있고, 미국의 의지에 따라서는 이 무렵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한 북·미 대화 가능성도 있다. 북한도 사실 북·미 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체 핵무장 발언을 아끼고 있고,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비방은 자제하고 있다. 대남 부서를 폐지하면서도 리선권, 김영철, 맹경일 등 대남 핵심 라인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재명 대통령도 국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방중을 통해 새로운 변화에 올라탈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에 대한 낙관론은 금물이지만, 과도한 비관론도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북·중, 북·러 관계의 발전을 한·중, 한·러 협력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북한은 ‘지방발전 20×10정책’,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 평양 종합병원 운영 등에서 김정은의 업적정당화(performance legitimacy)를 만들어야 하지만 자력으로 이를 풀기 어렵다. 따라서 중국을 통한 남·북·중 협력, 러시아를 통한 남·북·러 협력, 그리고 남·북·중·러의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사업을 중층적으로 우리가 엮어야 한다. 한반도 현상의 고착을 막으려면 비핵화, 동맹 현대화, 한·미 연합군사훈련, 대북 제재 등 민감한 사안을 패키지로 엮는 창의적 비전과 추진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토대로 물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