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도 한 달 남짓 남았다. 이제 함께해온 한 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할 때다. 그런데 새해를 맞이한다고 함의 실상은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옛사람들은 미래를 읽어내는 일을 들곤 했다. 옛사람들이 행한 미래 읽기의 기초는 이러했다. “귀가 밝은 자는 소리가 없는 데서도 들으며, 눈이 밝은 자는 형태가 없는 데서도 봅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인은 일을 만 번 시도하면 만 번 다 성공하는 것입니다.”(<사기>) 한마디로 있음에서 없음을 읽어낼 줄 알아야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는 뜻이다.
이를 꼭 성인에 관한 말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성인이 그렇게 하여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면, 성인급이 아닌 우리들은 성공은 아닐지라도 실패하지 않기만 해도 선방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재만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현재에서는 실현되지 않아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는 미래를 읽어내는 역량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에도 읽어낼 수 있음은 미래가 이미 현재에 스며들어 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의 왕만이라는 시인은 “밤이 다 새기 전부터 바다 밑의 해는 떠오르고/ 한 해가 다 가기 전부터 강에는 새봄이 스며든다”(‘북고산 밑에 묵다’)고 자신 있게 읊을 수 있었다.
새벽이 가면 아침이 옴은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다. 겨울이 가면 새봄이 옴도 마찬가지다. 새벽의 미명은 아침이 그 안에 이미 들어 있음의 반증이고, 꽝꽝 언 얼음이 시나브로 녹아감은 봄이 이미 그 안에 들어 있음의 반증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뿐, 이미 현재로 들어와 있는 미래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주목하지 못하면 미래 읽기를 수행치 못하게 되고, 이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로 드러난다. 미래는 현재에서 빚어지기에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송대의 대문호 소동파는 “세상 환난 가운데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겉으론 태평무사하지만 이면에 크나큰 우환이 잠재되어 있는 상태다. 그 변고에 주목하지 않아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두렵다”(‘조조론’)라고 토로했다. 앞으로 남은 한 달은 2025년에 스며들어 있는 2026년을 읽는 기간이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