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일상에 지친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려고 가끔 산에 오른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걷노라면 가쁜 숨 사이로 노랫가락이 절로 흘러나온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다가 흠칫 놀란다. 샘물을 홀로 누리겠다는 심사가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미심쩍어서다. 소중한 것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헤아려져, 이내 그 상황을 수긍하고 만다.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면 물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흐려지는 것이 어디 샘물뿐인가? 세상살이에 시달리고 인간관계에 치이면서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귀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쉬운 세상은 카프카의 ‘성’처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인류의 꿈일까? 혐오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타자에게 수모와 수치심을 안겨주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치기 어린 과시행동으로 대중 앞에 자기 얼굴과 이름을 각인시키고, 그것을 통해 유·무형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이들도 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좀처럼 경청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에도 생명과 평화와 자유의 씨를 파종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허명을 탐하지 않는다. 아픔의 자리에 다가설 뿐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의 곁에 다가가 설 땅이 되어줌으로써 정 붙일 곳 없는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사회적 약자, 학대받는 아이들, 은둔 청소년, 가출 청소년, 미혼모, 수용자 자녀, 장애인, 독거노인, 이주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주거 취약계층, 난민의 품이 되어주는 이들이야말로 지금의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은 선행을 과시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에 대중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노자는 자연의 원리를 자기 삶의 원리로 삼은 사람은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름답게 시작하여 누추하게 끝을 맺는 이들은 마땅히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일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 없다. 우리가 이룬 성취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실은 상황과 우연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일 때가 많다. 성취를 전적으로 자기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정신의 퇴락이 열린다. 성취의 도취감에 빠지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사라지고, 자기기만이 뒤따른다. 약점을 감추고 과장된 서사를 만들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그 결과는 행복이 아니라 불안이다. 자기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잠언은 “칭찬으로 사람됨을 달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제2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다그 함마르셸드는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라는 세계사의 가장 긴장된 국면 속에서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일했다. 그는 사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깊은 묵상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자신을 성찰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 기록인 <이정표>에 나오는 한 구절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무관심한 사람들의 평가, 의미 없는 표창, 공식 문서에 기록된 성과들이 엮어낸 ‘나’라는 자아를 입고 있다. 나는 구속의 옷을 걸치고 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인정과 자기 존재를 등치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구속복처럼 여겼다. 함마르셸드는 허명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고요한 곳을 찾곤 했다. 마치 수도사들이 침묵의 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아침 햇살 비치는 벼랑에 벌거벗은 채로 나아가야 한다. 빛 안에서, 빛과 함께. 나는 그곳에서 받아들여지고, 상처받지 않으며, 자유롭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 그 하나 안에서 진정한 존재가 된다. 자신이라는 장해물에서 벗어나, 나를 성취한다.” 이 홀가분한 삶의 자유는 허장성세라는 칭찬의 옷을 벗어버릴 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닐까.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