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색 모르는 서생이라는 타박을 들을 것 같아서 이런 말 하기 저어되지만, 내란 청산과 헌법·정치제도 개혁은 함께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란 청산 ‘후’ 헌법·정치제도 개혁이라는 주장의 배경은 이해한다. 그러나 청산과 개혁을 동시에 해나가면서 민주 헌정질서 회복의 길을 여는 것이 더 적실성 있는 전략이라고 본다. ‘순차론’보다는 ‘병행론’이 더 설득력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3일 내란은 한국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뜻밖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망나니 칼잡이에게 영웅적 서사를 만들어 입히고 술주정뱅이의 허세를 호연지기로 현혹했을 때 다수 국민이 속아 넘어갔던 건 우리 민주주의에 뭔가 ‘구조적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사유화, 거짓 정보를 이용한 정치 동원, 검찰·사법 권력의 일탈, 군대를 동원한 헌정 파괴 등도 누적된 시스템 결함의 결과다. 이번 내란은 특정 인물의 일탈이나 일회적 충격으로만 넘길 수 없는, 민주공화국의 근간이 부실한 탓이었다.
그래서 많은 시민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광장에 나섰다.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 실현과 대통령 책임 강화를 위한 개헌 추진’을 1번 국정과제로 정한 까닭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대통령 4년 연임제 및 결선투표제 도입, 감사원 국회 소속 이관, 검찰 영장청구권 독점 폐지, 행정수도 명문화,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등이 주요 의제로 제시됐다. 내년 지방선거 또는 2028년 총선 때 개헌 찬반 투표를 실시하는 일정표도 함께 붙었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우선 내란 청산부터 마무리하고, 그 뒤에 개헌과 정치개혁을 논하자’는 순차론이 나오고 있다. 이는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의 공식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청산과 개혁은 맞물려 있다. 청산 없는 개혁은 공허하고 개혁 없는 청산은 맹목이다. 청산에 골몰하느라 개혁의 시기를 놓쳐버리면 기득권의 반격은 반복적으로 찾아오고, 청산의 기준은 정치 공방으로 침식되며, 결국 현상 유지라는 이름의 퇴행만 남게 된다.
‘적폐 청산’이 제도 개혁의 뒷받침이 부족해 정치 갈등 속에 힘이 빠져갔던 기억은 멀리 있지 않다. 왜 그랬을까? 청산과 개혁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제도 개혁 없이 청산만 추진하면 기존 권력구조는 끊임없이 반격한다. 그들은 청산을 ‘보복’으로 왜곡하고, 수사기관을 흔들며, 책임자를 빼돌린다. 반대로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과거의 기득권 세력은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
따라서 이 둘을 ‘순차적으로’ 추진하는 전략은 실패하기 십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순차론’이 아니라 동시 추진 전략, 즉 내란 청산과 헌법·정치 개혁을 한 과정에서 결합하는 ‘병행론’이다. 내란 청산은 정의를 세우고, 헌법·정치 개혁은 그 정의를 지탱할 구조를 만든다. 청산이 정의의 복원이라면, 개혁은 역진 방지 장치다. 구조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청산이 아무리 강력하게 진행되더라도 또 다른 내란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개헌 논의를 꺼내면 내란 청산의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실제로는 개헌 논의가 병행될 때 청산의 동력은 더욱 강화된다. 개헌은 내란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미래의 비전이며, 청산은 과거의 책임을 묻는 현재의 과제다. 두 과정이 서로를 뒷받침하며 진행될 때, 시민들은 더 강하게 결집하고, 기득권의 반격은 구조적으로 차단된다.
내란 방지 개헌을 추진하는 국면에서는 기득권 세력의 동원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즉 “청산 후 개혁”의 순서가 아니라 “청산과 개혁”의 결합 구조가 정치적·제도적·시민적 최적 전략이다.
시민의 정치적 에너지는 구조적 변화와 결합할 때 강력해진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개헌 절차법, 지역 포럼, 정치개혁 캠페인 등 참여의 장을 넓힐 때, 내란 청산과 헌법·정치제도 개혁 모두는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가 서 있는 지점에서 보면, 내란 청산은 출발점이며, 헌법·정치제도 개혁은 목적지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민주주의의 복원은 반쪽이 된다. 내란 청산을 넘어 헌법·정치제도 개혁으로 나아가는 길이 대한민국이 다시는 내란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만드는 길이며, 미래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민주공화국을 물려주는 길이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시작해야 한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