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총리 최초로 재임기간 기소·사면 요청
“안보·외교·국익 위해 사면 필요”
트럼프 대통령, 2주 전에 “사면 촉구” 서한 보내
야권·법률 전문가 “법치주의 위배” 비판
이스라엘 대통령 자택 앞 시위도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텔아비브에 있는 이츠하크 헤르조그 이스라엘 대통령의 자택 앞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사면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네타냐후 총리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쓴 시위자가 헤르조그 대통령으로 분장한 남성과 함께 바나나 더미 위에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부패·사기·배임 혐의로 5년째 재판을 받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츠하크 헤르조그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면을 요청했다. 이스라엘 현직 총리가 재임 기간 기소된 것도 처음이며, 자신의 사면을 요청한 것도 처음이다. 이스라엘 야권과 법률 전문가들은 네타냐후 총리의 사면 요청이 법치주의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헤르조그 대통령실은 네타냐후 총리의 변호사로부터 111페이지 분량의 사면 탄원서를 제출받고, 법무부 사면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네타냐후 영상 성명을 내고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싶었지만 “안보와 외교적 현실, 즉 국가적 이익은 다른 것을 요구한다”며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은 격렬한 불화를 조장하며,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일주일에 세 번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리더십을 방해한다며 “많은 국민과 마찬가지로 나도 재판을 즉각 중지하는 것이 화해 촉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 10월13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크네세트에 연단에서 귓속말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네타냐후 총리의 사면 요청은 지난달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르조그 대통령에게 네타냐후 총리의 사면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지 2주 만에 이뤄졌다.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재판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요한 공동의 이익을 더욱 증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네타냐후 총리는 2019년 뇌물 수수, 사기, 배임 혐의로 기소돼 5년째 재판을 받고 있다. 세금 우대 입법을 원하는 사업가들로부터 20만달러(약 3억원) 안팎의 뇌물을 받은 혐의, 카타르에서 6500만달러(약 955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재임 기소된 현직 총리다.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며, 언론·경찰·사법부가 조작한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해왔다.
이스라엘 법률 전문가들은 현직 총리의 사면 요청은 전례가 없으며, 이스라엘 민주주의 핵심 원칙인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수지 나보트 이스라엘민주주의연구소 부소장은 “일반적으로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사면한다”며 “네타냐후 총리가 모든 통상적 절차를 우회하려고 노력했으며, 대통령에게 사면 권한을 남용하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유죄 인정이나 사임 없이 사면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헌법적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유죄 판결 없이 사면된 경우는 1986년 단 한 차례 있었는데,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처형을 은폐한 신베트(이스라엘 정보기관) 고위 간부들이다. 당시 간부들은 유죄를 인정했고, 신베트 수장은 사임했다.
나보트 부소장은 “네타냐후 총리가 유죄를 인정하지 않거나 사임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사면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네타냐후 총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상 법 위에 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국가 통합’을 위해서라는 네타냐후 총리의 주장과는 달리, 내년 10월 말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사면 요청이 이스라엘의 정치·사회적 분열을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뉴욕타임스는 전망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 한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야당 예시 아티드당 야이르 라피드 대표는 “네타냐후 총리가 유죄를 인정하고, 반성의 뜻을 밝히고, 즉각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사면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민주당 대표 야이르 골란은 “죄 있는 사람만이 사면을 구한다”며 “현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유일한 거래는 네타냐후가 책임을 지고, 죄를 인정하며, 정치에서 물러나 국민과 국가를 자유롭게 하는 것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국민적 단합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전 변호사인 미카 페트만도 “사면은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법이 규정하는 바”라며 네타냐후 총리가 유죄를 인정하기 전에 사면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진보 성향 매체 하레츠는 헤르조그 대통령이 네타냐후 총리의 사면 요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AP통신도 헤르조그 대통령이 네타냐후 총리와 과거엔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현재는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저녁 헤르조그 대통령의 자택 밖에서는 네타냐후 총리의 사면 요청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열렸다. 이들은 ‘사면=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헤르조그 대통령에게 사면 요청을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