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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구마

입력 2025.12.04 22:05

수정 2025.12.0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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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어떤 고구마

어느 산, 어떤 골을 오를 때의 일. 급경사를 치고 올라 호젓한 능선을 걸을 때였다. 풍성한 치마폭 같은 게 버티고 있어 문득 길이 끊겼다. 제법 널찍한 바위를 타고 넘어야 했다. 바위가 그냥 바위인 경우는 드물다. 바위 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침묵이 도사리고 있지만 바위의 표면은 식물의 훌륭한 서식처이다. 각종 이끼나 지의류는 아예 바위를 거처로 삼는다. 그것들이 표시하는 무늬를 보면 우주에서 누가 적은 심오한 문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힘을 한번 주며 휙 넘어가려는데 바위에 있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자세히 보니 이 산을 주름잡는 어떤 짐승이 내갈긴 그것이 아닌가. 이렇게 활짝 트인 개활지에서 볼일을 보는 녀석들이 보란 듯이 그 증거를 남긴 것이다. 어쩌면 영역표시일 수도 있겠다.

휴지를 사용하는 어떤 포유류의 지저분한 그것이라면 고약한 냄새에 얼른 발길부터 돌리겠지만 이것은 자연의 생생한 작품이다. 아무것도 아닌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사인하여 아무것으로 바꾼 마르셀 뒤샹보다 훨씬 윗길이다. 편의상 ‘고구마’라 하자. 두 종류가 섞인 고구마를 뒤적이며 그것의 주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어느 짐승의 털이 희끗 보인다. 통째로 삼켰다가 살코기만 먹고 털은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내놓았다. 일행 중에 이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 나섰다. 작은 설치류의 흔적으로 보아 삵일 것 같다고 추정했다. 또 하나의 고구마는 작고 귀여웠다. 좁은 꽁무니를 매끄럽게 잘 빠져나와 열매처럼 맺힌 그것들. 조약돌보다 작은 크기로 미루어 담비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다 순환한다. 지금 이 연쇄 사슬에 참여하는 나의 몸도 예외가 아니다. 저 고구마는 바위에서 빨래처럼 놀면서 시시각각 풍화되고 있다. 냄새는 대부분 바람이 거두어 갔다. 벌써 분해자들도 덤벼들고 있다. 이윽고 비라도 내리면 반죽이 되어 훌륭한 양분으로 주위의 나무를 먹여 살린다. 저 고구마 속에는 씨앗이 분명 들어 있을 것이다. 그 씨는 삵이나 담비의 따뜻한 뱃속에서 충분히 발아할 조건을 갖추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구마 속을 뒹굴다가 어느 적당한 곳에 안착할지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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