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가 새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유럽이 “문명의 소멸” 위기에 있다면서, 반이민을 앞세운 유럽 극우정당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반면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NSS는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경제적 침체가 아니라 “문명의 소멸이라는 현실 가능한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그 원인으로 이민정책, 표현의 자유 억압, 급락하는 출생률, 국가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실 등을 나열하며 “현재 추세가 지속된다면 20년 안에 유럽 대륙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된 반면 유럽 백인의 출생률은 떨어지면서, 국가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NSS는 “우리는 유럽이 유럽적인 상태로 남길 원한다”면서 “유럽이 현재의 궤도를 바로잡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혔다.
유럽에 대한 이같이 신랄한 비판은 J D 밴스 부통령이 지난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유럽을 경악시켰던 연설의 연장선이다. 당시 밴스 부통령은 “유럽이 직면한 위협은 러시아도, 중국도 아니라 유럽의 가장 중요한 근본 가치가 후퇴하는 것”이라고 훈계하며 “독일의 주류 정당이 독일 극우당(AfD)과 연립을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역행한다”고 주장해 유럽 당국자들에게 충격을 안긴 바 있다.
NSS는 당시 밴스 부통령의 연설을 아예 국가 전략으로 공식화했다. NSS는 “애국적 유럽 정당들의 영향력 증대가 큰 낙관의 근거가 된다”면서 “유럽 각국 내부에서 현재의 잘못된 흐름에 대한 저항을 촉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NSS가 언급한 ‘애국적 유럽 정당’은 반이민 기치를 내건 영국개혁당과 독일대안당(AfD) 등 극우 정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에게 이같이 맹폭을 가한 NSS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비판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의 일부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비현실적 기대 때문에 평화를 원하는 대다수 유럽인의 바람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의 핵심 이익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신속한 전투 중단을 협상하는 것이며, 러시아와의 전략적 안정을 재확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바이든 전 행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했던 톰 라이트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은 “새 NSS는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반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청사진”이라고 비판했다. 애틀랜틱 카운슬 수석 연구원인 토리 타우시는 “NSS는 러시아가 대서양 안보에 가하는 위협에 대해 더 큰 방위 책임을 떠맡으려는 국가들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오히려 국방 예산을 삭감할 가능성이 큰 포퓰리즘 극우 정당 지원에 나선 자책골과 같다”고 지적했다.
유럽 국가들은 크게 반발했다. 유럽의회 대미관계위원장인 브란도 베니페이 의원(이탈리아)은 NSS가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문구”로 가득 차 있고, 일부 내용은 노골적인 선거 개입 같다면서 “유럽연합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맹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