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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적 진실 시대의 사회적 신뢰

입력 2025.12.07 20:21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현수막을 걸기 좋은 ‘목 좋은’ 장소들이 두세 군데 있다. 지난 몇년간 그곳에는 백신 음모론에서부터 부정선거 음모론, 계엄과 내란 옹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헛소리를 담은 현수막이 쉬지 않고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처음에는 한심하다고 혀를 찼지만, 점차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믿는 사람들이 ‘실존’하고, 심지어 구체적 행동에 나서는 모습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청부과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환경보건학자 데이비드 마이클스 책의 원래 제목은 <의심이 그들의 제품(Doubt is their product)>이다. 이는 “의심이 우리의 제품이다. 그것은 일반 대중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사실들’과 경쟁하는 최선의 수단이며, 또한 ‘논란’을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담배회사 경영진의 발언을 비튼 것이다. 담배, 벤젠처럼 사람들의 건강에 해를 끼치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건강에 이롭다거나 무해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다만 유해성을 주장하는 연구들에 이런저런 방법론적 결함들이 있고 악영향을 끼치는 다른 요인들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니 근거가 확실해질 때까지, 논란이 종식될 때까지 좀 지켜보자는 의심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식이다. 학계 동향이나 연구의 기술적 세부 사항을 따져가며 옳고 그름을 일일이 판단하기 어려운 대중들 입장에서는 논란이 ‘있어 보이는’ 것 자체가 기존에 확립된 진실을 불신하게 만드는 좋은 근거가 된다.

이러한 전략은 정치사회 영역에서도 작동한다. 뜬금없는 비상계엄으로 무장한 군경을 동원해 국회를 침탈하려 했고, 체포 명령에 불복하며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 했으며, 사법기관을 물리적으로 점거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음에도, 마치 이러한 행동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존재하는 것처럼 ‘공정하게’ 찬성·반대 패널을 불러서 토론시키는 모습이야말로 사건 본질을 훼손하는 가장 효과적 전략이다. 권위주의 독재의 DNA를 타고난 민정당 후손들이나 신정일치를 꿈꾸는 기독교 분파들이 내뱉는 주장들의 가장 큰 해악은 허무맹랑한 발언의 내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프레이밍하는 그들의 접근 방식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과 가장 거리가 먼 권위주의 성향의 집단이 이러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대단히 아이러니하지만,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전략은 아니다. 미국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돌베개·2019)에서 트럼프로 귀결된 ‘탈진실’ 현상의 계보를 분석한 바 있다.

신뢰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국가 제도와 동료 시민을 불신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법과 규칙을 지키고 대가 없이 타인들과 협력하며 공동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은 작다. 초록불이 켜지면 움직이고 빨간불이 켜지면 멈춘다는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작은 믿음이 없는 도로에서 과연 어떤 대혼돈과 파국이 펼쳐질지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 규칙을 만들고 사람들이 이를 지키도록 해야 할 임무를 지닌 사법·입법 기구의 권력자들, 언론이 앞장서서 제도와 사회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생명과 민주주의를 훼손하려 했던 이들에게 ‘법리적 다툼의 여지’ ‘정치적 박해’를 운운하며 다른 진실이 존재하는 양 ‘논란’을 확산시키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학습시키고 있다. 그로 인한 이득은 소수에게 집중되지만 그 대가는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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