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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더 넓고 깊은 민주주의와 부자증세

입력 2025.12.08 19:59

수정 2025.12.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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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3일 불법계엄의 밤, 시민과 의회가 함께 계엄을 막아낸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찬 바람 부는 겨울 광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내란세력 청산은 물론, 삶의 경험에 기초한 사회개혁 과제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할 때 나는 2025년이 온갖 억압과 부자유를 떨쳐내도록 만드는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소망했다. 농민, 노동자, 어린이, 청소년,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빈민 혹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 빛나는 목소리들이 공중에서 흩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정책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치열하게 토론하고 더 나은 사회를 설계하는 것, 아마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위기 시에는 광장에서 빛을 발했지만, 위기가 끝난 후에는 광장을 넘어 더 넓고 더 깊게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광장의 민주주의는 바로 앞 국회 담장을 넘는 것조차 힘겹고 사법부와 행정부는 더 멀다. 정치란 것을 한 사회의 자원 분배 질서를 만드는 과정과 방식에 관한 것이라 한다면,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는 시민에게 불법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노동권은 물론 필요한 돌봄과 소득을 보장하는 것으로 나아간 바 있다.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권을 보장하면서 시민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한다. 요컨대 시장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매 시각 발생하는 불평등과 거대한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민주주의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한국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66%에 불과하며,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국가(평균 11.3%) 중 1위이다. 특히 간병, 요양, 보육 등 돌봄노동자의 임금은 지나치게 낮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0%에 가까울 정도로 많고, 이에 더해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인정되지 않는 비임금노동자 규모도 상당하다. 문제는 점입가경인데, 생애 전반에 걸친 불안정한 노동에 뒤이어 찾아오는 노후빈곤은 경제가 발전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OECD 국가 중 한국처럼 노인 10명 중 약 4명이 빈곤한 나라는 없다. 더욱이 젊은이들에게는 자산, 건강, 교육 등 다양한 차원에서 불평등이 심각하다. 특히 자산불평등이 커지고 있는 현 상황은 우려스럽다. 자산불평등 심화는 결국 계층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전망을 더 어둡게 만든다. 과연 이러한 삶의 불안정성과 불평등은 우리가 ‘민주적으로’ 합의한 결과인가?

우리 사회 민주주의는 호도되기 쉬워 불안정해 보인다. 특히 사회정책에 관해서는 청산되지 않은 오래된 유산이 있다. 노동과 복지에 대한 담론은 소위 복지병, 국가부채, 재정위기 담론에 오래 포위돼 있었다. 현재 재정 제약에 대해서는 지난 윤석열 정부가 부지런히 수행한 감세정책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지만, 유포되는 공포의 내용은 더 광범위하다. 국민연금기금에 대한 과장된 공포가 대표적이다.

불안정성과 불평등 확대는 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조세제도의 혁신과 복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자산불평등이 커진 많은 나라에서 부자증세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자증세를 요구하며 영국 황태자가 대관식에서 썼던 왕관에 음식을 투척하거나, 시위에 나선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부자는 치킨이 아니라 세금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금융시장 부흥의 시대로 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분배와 재분배의 질서는 무엇인가? 이 무거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아무래도 민주주의가 광장을 넘어 다시 흘러넘칠 필요가 있겠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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