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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학계의 수능 쿠데타

입력 2025.12.17 19:56

수정 2025.12.1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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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중등 교육은 200개 남짓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문항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학 이론으로 보면 학교 수업(교육과정)이 몸통이고 수능(평가)은 꼬리지만, 교육 현실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교육은 물론이고 공교육 자체가 수능 문제 풀이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얼마나 가르칠지 결정하는 교육과정 개편을 흔히 권력투쟁에 비유하지만, 수능에 무슨 과목을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반영할지 정하는 일도 그 못지않다.

사상 최악의 수능 ‘불영어’로 대학 입시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수능 영어 문제가 영국 BBC나 미국 뉴욕타임스 같은 외신에 “고대 문자 해독 수준” “미친 시험”이라며 웃음거리로 소개될 정도다. 교육부는 2018학년도부터 수능 영어에 절대평가를 도입했는데 올해 90점 이상을 받은 1등급이 3.11%에 불과하다. 상대평가 1등급(4%)보다 비율이 낮게 나왔으니 입시 경쟁 완화와 학생들의 학습 부담 경감이라는 절대평가 도입 취지에 정면으로 거스른다. 기본적으로 입시가 ‘제로섬게임’이라 이득을 본 수험생도 있지만, 수시모집에서 지망 대학의 수능최저학력기준을 맞추지 못해 고배를 든 수험생들은 벌써 재수학원을 기웃거린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는 학생과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수능 영어를 초등학교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영어영문학회 등 학계의 압력과 수능 영어 출제진의 ‘미필적 고의’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주지하듯 영어학계는 영어 절대평가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표면적으론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유지만, 1945년 이후 유지되고 있는 입시의 ‘국·영·수’ 체제에서 영어가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깔려 있다. 30여개 학회의 모임인 ‘한국영어학술단체협의회’는 이번 불영어 사태에 “영어만 절대평가 하는 불공정한 정책의 실패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공교육의 핵심인 영어의 아성도 흔들리고 있다. 영어 절대평가 시행 이후 서울 일반고에서 기초 교과목 중 영어를 선택한 비율은 2019년 92.7%에서 2023년 80.6%로 떨어졌다.

영어는 중요하다. 국제화·세계화 시대 공용어다. 충분한 실력 없이 대학에 들어가면 원서 강독이나 영어 강의 수강에 어려움을 겪는다. 인터넷의 방대한 정보 대부분이 영어로 제공된다. 영어 능력은 최신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 역할을 한다. 학교에서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으면 가정 배경이나 경제력에 따라 영어 능력 격차가 커져 계층 이동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영어는 여러 외국어 중 하나다. 첨단 기기가 등장하면서 예전보다 학습 여건이 월등히 좋아졌다. 휴대폰에 앱을 깔면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단어 학습과 원어민 회화를 할 수 있다. 영어를 몰라도 인공지능(AI) 통번역 기능을 이용하면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다. 초중고교에선 기초 문법이나 가벼운 회화 정도를 익힌 뒤 나중에 성인이 돼서 필요할 때 공부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학교 교육이 영어에 편중돼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와 일본어, 동남아시아 등의 언어 교육 기회가 줄어드는 부작용도 크다. 시대 변화도 고려해야 한다. 영어영문학과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국력이 강해지고 한국어의 위상이 높아지면 영어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수능 불영어 사태는 심히 유감이지만, 이번 기회에 영어의 경중을 종합적으로 따져 영어 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정해야 한다. 유치원부터 고3까지 그렇게 많이 영어를 공부하고도 국민 대다수가 외국인 앞에서 입을 뻥끗 못하는 작금의 교육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학생들의 총 공부 시간은 정해져 있다. 영어 공부를 늘리면 사회·과학 등 다른 과목 공부나 음·미·체 활동 시간이 줄어든다. 돈과 자원도 한정돼 있다. 영어 사교육에 지출을 늘리면 외식과 여행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고려와 반성 없이 영어학계가 수능 영어 절대평가 폐지만을 주장하면, 사회의 공감을 얻기 어렵고 ‘밥그릇 지키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수능 문항 난이도 조절 실패로 축소할 사안이 아니다. 수능 관리 책임자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사퇴로 봉합해서도 안 된다. 덮고 뭉개면 당장은 편하지만 내년에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설령 수능을 폐지해도 영어 교육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필요하다.

오창민 칼럼 논설위원

오창민 칼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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