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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은 누구인가, 배추흰나비와 기생말벌

입력 2025.12.17 20:07

수정 2025.12.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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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악당은 누구인가, 배추흰나비와 기생말벌

여기저기 떠돌다 우연히 빈집을 찾은 유랑 가족이 있다. 비록 빈집이었으나 주인의 손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먹을 것도 남겨져 있기에, 부모는 아이들을 잠시 이곳에 남겨두기로 하고 집을 떠난다. 물론 주인의 허락을 받았어야 마땅하나, 아이들은 너무 어려 데리고 갈 수 없었고 어차피 얼마 가지 않아 떠날 것이기에 그냥 눙치고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주인이 찾아오고, 허락없이 세간살이를 이용하고 곡식 창고를 거덜내고 있던 이들에게 분노한 그는 왈패를 불러들인다. 주인의 묵인하에, 왈패들은 강력한 힘을 앞세워 살던 이들을 잔혹하게 괴롭히고 착취하기 시작한다. 잘못을 빌고 떠나고 싶어도 왈패들은 이들을 놓아주지 않았고, 결국 지나친 폭력과 학대에 못 견딘 이들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비정한 주인은 집을 되찾은 것에만 기뻐하며 이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뢰를 해결한 왈패들은 두둑한 주머니를 두드리며 다시 다른 희생자를 찾아 떠난다.

만약 이런 플롯을 가진 영화가 개봉한다면,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모의 방치와 집주인의 학대에 희생된 아이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이들의 죽음을 유도하고 방조한 이들에게는 분노하여 복수를 기원하는 반응 말이다. 이런 상황은 인간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자연에서 이런 일은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다만 자연의 무대를 바라보는 인간 관객의 시선에서는, 괴롭힘에 죽어가는 이들이 오히려 해충으로 미움받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잔인한 왈패들은 익충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의외일 뿐이다.

십자화과 배추속에 속하는 배추, 양배추, 브로콜리, 순무, 갓 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의 사랑을 받아온 작물들이다. 그중 양배추는 생육 기간이 짧고 서늘한 기온에서도 잘 자라 이미 수천년 전부터 중국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재배해온, 흔하면서도 역사 깊은 채소다. 하루가 다르게 토실토실 둥글어지는 양배추는 사람뿐 아니라 곤충에게도 매력적이다. 짝짓기를 한 배추흰나비는 양배추 이파리 뒤에 알을 낳고 떠나가고,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양배춧잎을 갉아먹으며 자란다. 배추흰나비의 유충은, 대개 모든 생물의 어린 것들이 그렇듯이 엄청난 먹성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루이틀 만에도 커다란 배춧잎에서 잎맥만 남기고 모조리 갉아먹을 정도로 피해를 주는 밉살맞은 해충이 된다.

하지만 배추흰나비는 매우 흔하며, 나비 한 마리가 평균 100개 이상의 알을 낳는 것을 감안한다면, 생각보다 이들에 의한 식물의 피해는 그리 심한 편이 아니다. 그건 배추흰나비의 먹이가 되는 식물들이 결코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기에 외부 공격에 직접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식물들은, 종종 외부 공격에 대해 지원군을 불러 대리전을 치르게 하곤 한다. 배추흰나비 유충이 잎을 갉아먹기 시작하면, 식물들은 흔히 ‘상처호르몬’이라 불리는 물질들을 다량 분비하는데 이 중에는 재스몬산(Jasmonic acid) 유도체들도 섞여 있다. 재스몬산은 양배추가 주변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일종의 SOS 신호다. 만약 근처에 기생말벌이 있다면, 이들은 재스몬산 신호가 발생하는 곳을 추적해 배추흰나비 유충을 찾아 그 몸에 알을 낳는다.

알에서 깨어난 기생말벌의 유충은 숙주가 되는 배추흰나비 유충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성충이 될 때까지 숙주의 몸을 말 그대로 속부터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기생말벌의 생활사는 어떻게 보아도 비정하고 계산적이다. 이들은 숙주의 몸속에 파고들어 숙주를 산 채로 모조리 파먹지만, 자신들이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는 숙주가 죽지 않도록 그 강도를 적절히 조절할 줄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에서 배추흰나비의 개체수를 적절히 조절해 양배추를 비롯한 십자화과 식물이 번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절자이면서, 농부들에게 한 해 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돕는 익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본성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쌓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친밀함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바탕이자 힘이 되곤 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제대로 기능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때로 부서진 곳은 단호하게 잘라내고,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도려내는 결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정에 이끌리고, 관계에 매몰되어 구멍난 곳을 덮어두어봤자, 남는 건 악취와 더 큰 상처뿐일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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