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낡은 문장에서 해방되려면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낡은 문장에서 해방되려면

입력 2025.12.23 20:01

수정 2025.12.23 20:03

펼치기/접기

세상일이 내 뜻 같지 않을 때 나는 흐릿한 미래보다는 제법 선명해 보이는 과거를 돌이켜 보곤 한다. 저렇게 또렷한 옛길도 많은 사람들이 수상한 안개를 뚫고 수고스럽게 걸어 온 덕분에 생겼다. 지금 당연한 것이 과거에는 격렬한 의심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면, 가망 없이 갈라져 가는 오늘을 낙관할 힘이 불쑥 솟아나곤 한다. 그래서 오래된 문장이 그럴듯한 새 옷을 입고 우리 주위를 배회할 때면 나는 오히려 반갑다. 나아갈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월을 거슬러 가보자. 19세기 영국 의회는 아동노동을 제한하기 위해 연일 논쟁을 벌였다. 찬반 진영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때 아동노동이 불가피하다고 한 사람들은 짧고 강력한 문장을 하나 제시했다. “아동노동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누군가의 잔혹함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핏 그럴듯한 주장은 곧바로 아동노동의 규제나 철폐는 가족을 더 깊은 빈곤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라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이 문장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문장도 있었다. “노동이 복지이자 보호다.” 아이들을 일터에서 떼어내면 그들은 방치되고 타락할 것이기 때문에 아동노동은 착취가 아니라 훈육이고 사회로 편입되는 통로라는 설명이었다. 학교는 부족했고 복지는 없었으며 방치는 실제로 위험했었던 사정에 대한 이런 ‘사실주의적’ 묘사는 곧 아동노동이 가장 현실적인 차선이라는 주장으로 둔갑했다. 아이들을 위하는 말처럼 들리는 문장은 정작 아동의 복지와 보호에 침묵했다.

또 하나의 문장이 더해졌다. “국가는 가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아이의 노동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사적 영역이므로 국가는 그 사이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과 일터는 ‘외부세력’이 사사로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시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등장하는 순간, 논쟁은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가 되었다. 아이는 사라지고, 금시초문의 권리가 등장했다. 자유는 실체를 잃고 모호할 때 지배의 언설이 된다. 이 세 문장은 묘하게 잘 맞물렸다. 가난을 말하고, 보호를 말하고, 자유를 말한다. 어느 하나도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성실했고 현실적이었다. 그 문장들을 말하는 이들 역시 스스로를 냉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을 말하고 있을 뿐, 감정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우리는 아동노동이 없는 사회에 마침내 합의했다. 치열하고 질기게 같이한 싸움 덕분이었다. 학교가 생기고 보호가 확장되어, 아이는 학교를 가고 어른은 일터로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 문장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문장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던 ‘현실’을 사람들이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방심하고 이런 낡아버린 문장은 시대에 맞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할 때, 최소한의 임금을 말할 때, 일터의 폭력과 차별을 없애자고 할 때, 말해져야 할 것에 목소리를 주려 할 때마다, 낡은 문장들은 능청스럽게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논쟁들을 볼 때 누가 옳은지를 묻기 전에 어떤 문장이 호출되고 있는지를 살핀다. 오래 살아남은 문장일수록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의심받지 않는 형태로 우리를 설득한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 문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을 바꾸는 불편을 우리에게서 슬그머니 치워준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요구하는 비용에 대해 묻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이 거의 언제나 옳아 보인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장에 동의하기보다, 그 문장이 요구하는 조건을 묻지 않게 된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늘 익숙한 침묵이 남는다. 힘 있는 사람들은 이 문장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랑은 낡은 문장들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한다.

진보라는 것은 더 똑똑해지는 데서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판단의 무게를 조금 덜 영리하게, 조금 더 고르게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언제나 같은 사람이 감당하던 계산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일.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불리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수고로운 시간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수고로움이 꼭 어쩔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낡은 문장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