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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해

입력 2025.12.23 20:09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는 날이면 대학원에 다니며 기숙사에 살던 때가 떠오르곤 한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지속하는 것이 점점 벅차던 때였다. 장학금 기회는 학부 때보다 적었고, 아르바이트 없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선후배 동기들이 부러웠다. 재능이나 집중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던 시기는 지났고 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여할 수 있느냐로 성과가 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그때 내게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한창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기숙사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 불시에 방을 점검하러 온 기숙사 조교가 책상 위의 전기포트를 발견하고서 시작된 일이었다. 기숙사에서는 겨울철 화재 위험으로 종종 방 점검을 했는데 규칙을 어길 시 사생에게 벌점을 부과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조교 재량으로 처벌의 정도가 많은 부분 달라졌다.

유난히 자비 없고 잔인한 조교를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전기포트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내게는 벌점 10점과 함께 7일 내로 퇴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것이 얼마나 예외적으로 불공평한 일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직전 해에 내가 기숙사 조교로 일했으므로. 놀란 내가 소명할 기회를 달라고 빌며 경위서를 빼곡히 작성하자 해당 조교는 ‘조교지시불이행’이라는 명목을 들며 벌점 3점을 추가해 총 13점의 벌점을 내게 부과했다. 퇴거통보지에는 7일 내 퇴거하라는 명령을 포함해 다음해 입주 승인도 취소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겨울이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살던 시기에 보증금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기숙사 관장도 찾아가보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사정도 해보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절박함 때문에 구차해지는 순간마다 스스로가 깎여나갔다. 그리고 팽팽했던 줄이 끊어지듯 나는 일상을 간신히 지탱해오던 힘을 모두 잃고 말았다. 한동안 이불 속에 들어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설가 김연수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는 그때의 내가 붙들고 살던 문장들이 담겨 있다.

어느 날 주인공 남자는 갑작스레 여자친구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유서 속 내용을, 자살이라는 그녀의 선택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고통으로 가득 찬 불면의 밤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잠이 오지 않을까 하여 소설을 집어든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만난다.

“이제껏 카터는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변의 다른 평범한 사내들보다 훨씬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밖에서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책에서 읽었거나 사람들에게 들은 지식을 총동원해 여점원들의 성격이나 습관 등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짜냈다.”

남자는 세 번에 걸쳐 그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다. 그러고는 책을 덮고 가족들이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이불을 뒤집어쓴다.

“총동원해. 그 문장을 통해 그는 세상에서 아무리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있다는 걸 납득했다. 눈물이 흐르고, 그다음에 우울이 지나갔으며,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슬픔을 납득했다.”

남자의 이야기를 읽던 나도 책 속의 문장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러고는 책을 덮고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썼다. 총동원해. 세상에는 아무리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있다.

그날 밤 나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게 닥친 슬픔을 배우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울고 다음날이 되었을 때 나는 전보다 지혜로워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봄이 찾아왔고 다음번 상실을 겪는 일은 그해 겨울보다 수월했다.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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