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무렵, 미국의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고향 마을을 떠나 켄터키로 이주해 살았다. 이웃들은 모두 가난했다. 어느 날 그들은 속칭 샷건 하우스라 불리는 판잣집에 사는 헤이즐 바넷이라는 늙은 이웃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여인은 “밤에 당신네 불을 보는 게 좋아요. 이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라고 말하며 그들을 반겨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두 가정은 서로 살아온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헤이즐이 몇해 전 성탄절 전날 심장 발작을 일으킨 아들을 돌보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헤이즐은 두고 온 옛집을 늘 그리워했다. 그러나 차가 없었기에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로빈의 어머니는 어느 날 헤이즐을 차에 태워 그의 옛집으로 모셨다.
여러 해 방치된 채 퇴락한 집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 안의 물건 하나하나에는 헤이즐의 기억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지만, 주인이 없는 동안 굴뚝새가 그 집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 헤이즐은 자기 옛집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성탄절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누고 함께 캐럴을 부르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로빈의 어머니는 그 소원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성탄절 축제를 준비했다. 전기회사에 전화해 며칠만이라도 전기를 연결해달라 부탁했고, 차로 물을 실어 나르며 집을 청소했다. 손수 쓴 초대장을 이웃들에게 건네고, 붉은개잎갈나무 가지로 식탁을 꾸몄다. 트리에는 지팡이 사탕을 매달았다. 성탄절 아침,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트리에 불을 밝혔다. 점심 무렵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헤이즐에게 함께 갈 곳이 있다며 그를 옛집으로 데려왔다. 문을 연 헤이즐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번졌다. 로빈의 아버지와 언니는 바이올린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연주했다. 로빈이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탄절이었다.
한 사람의 시린 마음을 눅이기 위해 들인 시간과 정성은 낭비가 아니다. 손익을 따지지 않는 선택, 효율을 묻지 않는 마음씀씀이야말로 거룩에 가장 가까운 행위일지 모른다. 회한과 아픔이 응결되어 생긴 내면의 겨울을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는 일처럼 값진 일이 또 있을까.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대개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혹은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허비한 시간과 사랑을 통해 현전한다. 그런 낭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던 담을 허물고, 고립된 삶을 다시 연결한다. 성탄절은 우리를 그러한 거룩한 낭비의 세계로 초대한다. 로빈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성탄절은 타인의 고통을 세심히 살피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보살핌은 살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살핌은, 외면해도 되는 사람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성탄의 빛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성탄절 다음날 상황은 급변한다. 동방박사를 인도하던 별빛은 사라지고, 목자들에게 들려오던 천사들의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늘 불안에 시달리던 헤롯은 세상을 뒤흔들 존재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았기에 그는 새로운 생명의 등장을 위협으로 느꼈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한다.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 진리의 터전 위에서 모두가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 오신 이가 위기에 처해 있다. 강보에 싸인 세상의 희망을 지켜줄 이들이 필요하다. 그 희망이 폭력으로 제거되거나 침묵 속에 고사하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종교의 본령일 것이다. 가녀린 생명을 품는 일은 연약한 감상이 아니라, 죽음의 질서에 저항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허비하는 시간과 정성이 헤롯의 칼날보다 강하다. 성탄의 별빛이 사라진 오늘, 우리는 서로의 어두운 창가를 밝히는 작은 불빛이 되어 그 시린 겨울을 함께 건너야 할 때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