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산업 내리막길 걷는 미국
글로벌 선사들 기준 미달 중국
서로 ‘한국 조선업 밀착’ 경계
암모니아·수소·SMR 지원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미 해군의 신예 프리깃함(호위함) 건조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 22일(현지시간) 최대 25척의 신형 군함을 확보하는 ‘황금함대’ 건조 계획을 발표하며 중국과의 해양 패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글로벌 1위 조선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 조선사들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화를 협력 대상으로 콕 집었고, 건조 주체인 헌팅턴잉걸스는 HD현대와 기술 협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조선업계는 그간 숙원이던 미국 함정 시장에 진출했지만, 미·중 해양 패권 경쟁에 휘말릴 가능성도 커진 모양새다. 한국 조선업이 미·중 경쟁이라는 ‘암초 지대’를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조선의 ‘심장’과 중국
HD현대중공업의 메탄올 이중연료 대형엔진 ‘11X92-B’. HD현대중공업 제공
조선의 핵심 부품은 ‘선박 엔진’이다. HD현대는 특히 1989년 이후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HD현대는 2021~2024년에는 전 세계 선박용 엔진 시장의 대형 엔진 약 30%를, 중형 엔진은 약 45%를 공급했다. 대형엔진(저속엔진) 중심으로 사업을 꾸리는 한화는 HD현대에 이어 세계 선박 엔진 시장 점유율 2위를 유지하고 있다.
선박 엔진은 한국 조선업이 가장 어려울 때 ‘버팀목’도 됐다. 2010년대 중반부터 2020년 초반 조선 불황이 이어지고 2022년 철광석 가격 인상으로 철강업계가 후판(선박에 쓰이는 두꺼운 열연강판) 가격을 2배 가까이 올릴 때도 선박 엔진은 조선 기업의 적자를 완화했다.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 선박 엔진 등 엔진류 매출은 2021년 1조4727억원에서 매년 성장해 지난해 3조1343억원을 달성하고, 올해는 3분기까지 2조9902억원을 기록했다. 전체 매출 대비 18~24% 수준이다.
한국 입장에서 중국은 글로벌 조선 시장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선박 엔진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고객이기도 하다. HD현대 관계자는 “중국은 세계 최대 조선 수요국이자 전략적 수출 시장”이라며 “(중국이) 올해 당사 전체 엔진 수주 중 50%를 차지할 정도”라고 말했다.
국가 단위로 봐도 선박 엔진 분야에서 중국의 한국 의존도는 높다. 한국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중국의 총 선박 엔진 수입액 중 한국 비중은 2021년 58.72%, 2022년 52.82%, 2023년 64.21%, 지난해 70.04%까지 빠르게 증가했다. 올해 들어선 10월까지 중국의 선박 엔진 수입액은 총 11억5758만달러(약 1조6603억원)로, 이 중 한국은 약 62.82%인 7억2724만달러(약 1조430억원)를 차지했다.
지난 8월 미국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미 해양청이 발주한 국가안보 다목적선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이 열리고 있다. 이 행사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참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황금함대’ 구상을 발표하면서 협력업체로 한화오션을 지목했다.
중국이 한국의 선박 엔진을 수입하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 HD현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엔진 자립 시도가 있지만, 여전히 글로벌 선사들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한국산 엔진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환경 규제가 심해지고 지정학적 위기가 이어지면서 선주사들의 친환경·초대형 컨테이너선 투자가 늘었는데, 한국의 선박 엔진이 높은 신뢰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취지다.
미·중 해양 패권경쟁과 한국
문제는 미국이 한국의 대중 선박 엔진 수출이 많아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정확한 기준까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을 대상으로 한 엔진 판매가 많아진다 싶으면 (미국에서) 판매 자제를 요청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예민한 태도는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선박 엔진 생산 기술력이 결국 조선 산업의 경쟁력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엔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동력 전달 부품 등 전·후방 산업도 함께 성장하고 실제 생산 기회 또한 많아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조선 산업 자체가 사양화하며 부품을 공급할 전후방 산업 또한 전부 사라진 상황이다.
반대로 중국도 한·미 간 ‘조선업 밀착’에 대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지난 8월 한·미 조선업 협력에 대해 한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한국이나 일본 (기업의) 로고가 붙은 선박들이 제3국에 대한 미군 작전에 쓰이면 한·일이 곤란해질 수 있다”고 논평을 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제재로 반사이익을 보고 있지만, 거꾸로 중국이 한국을 대상으로 제재할 가능성도 있다며 ‘기술 격차’를 더욱 가속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제해사기구(IMO)는 해운시장에서 2050년까지 친환경 연료를 활용한 100% 탄소 감축을 목표로 잡고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친환경 연료로 가동이 가능한 선박 엔진 설계와 생산에서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에 따라 향후 선박 엔진과 조선 산업의 주도권이 바뀔 수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조선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의 조선 엔진 개발은 이미 회사별로 독립적으로 잘하고 있지만, 미래 에너지원으로 지목되는 암모니아와 수소, SMR(소형모듈원자로) 등은 위험성이 있고 생소하다”며 “이들 에너지원의 기반시설이나 공급망을 갖추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