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관리학에서는 생산성, 효율성, 수율 등을 강조한다. 비슷한 말들이다. 동일한 노동 투입에 더 나은 결과물. 회사 상황에 따른 고용의 탄력적 변화라는 의미의 유연성도 있다. 전부 관리자의 관점이다. 와중에 놀랍게도 행복이 꼽히기도 한다. 비록 결국엔 생산성을 위한 행복이지만.
이 겨울, 한국 사회는 현대 노동의 기저에 깔린 어떤 결핍을 목도하고 있다. 바로 ‘신뢰’다. 조직은 노동자를 신뢰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추상적인 규범론이 아니라 그 대답에 따라 노동의 통제 방식,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달라지는 실천적 질문이다.
2020년 10월 쿠팡 칠곡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장덕준씨가 과로로 사망했을 때 내부 보고 과정에서 고인이 평소 성실하게 일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그 기업 의장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그가 왜 열심히 일하겠어? 말이 안 돼. 그 사람들 시급 노동자들이잖아. 성과급이 아니라 시급을 받잖아!” 이 말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노동관을 내면화한 관리자들과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의 언어다. 열심이란 연말 성과급, 스톡옵션, 임원진 합류, 동문이 경영하는 회사로 화려하게 이직 등 자아실현적 보상이 기다릴 때의 이야기다.
일찍이 미국 MIT 교수 더글러스 맥그리거는 <기업의 인간적 측면>이라는 저서에서 경영자가 노동자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을 제시했다. X-이론은 인간을 게으르고 책임을 회피하는 존재로 가정한다. 그래서 경영자 입장에서 필요한 건 통제다. Y-이론은 인간을 자아실현을 추구하고 책임을 느끼는 존재로 가정한다. 이때 필요한 건 신뢰다. 두 가정 중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영자가 노동자를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노동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작동하게 된다는 점이다.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지시는 X-예언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기업이 불신에 기반해 구축한 촘촘한 관리통제 시스템이 예측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러다 생을 달리했다. 왜일까. 그 대답을 1960~1970년대 10대 중반의 나이부터 구로공단과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이미 해주었다. 최저임금도 없고 근로기준법도 지켜지지 않는 상태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노동해야 했던 그들은 과연 X-이론을 입증했을까?
반대였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구해근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목에서 까만 핏덩이가 나오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힘들고, 신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발이 퉁퉁 부으면서도,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일했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가족에 대한 헌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가운데서도 점차 높아지는 기술적 숙련을 통해 느끼는 자부심과 주체성, 혹독한 환경에서 길러진 동료와의 연대감을 통해 스스로 노동계급으로서, 시민으로서, 심지어 회사의 같은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이런 역사적 교훈은 어디로 갔는지 오늘날 노동의 통제는 십장의 고함이 아니라 성과주의와 단기 계약이라는 형태로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불신의 제도는 동료를 경쟁자로 만들고, 자신을 묘하게 게으른 존재, 조직에 있지만 그 일부가 아닌 존재로 느끼게 한다. 왜곡된 능력주의는 이들을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패배자’로 만든다. “그들은 시급 노동자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뿐히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승객이 되고,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홍수에 떠밀려가는 시대의 낙오자들이 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혹시 나도 이들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 적 없는가? Y-이론을 믿는 것 같지만 막상 내가 관리하는 하급자는 열심히 일할 리가 없는 존재라고 가정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나 자신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Y-관리자/노동자라고 가정하지 않는가? 시급 노동자를 비추는 CCTV를 보고 있는 나를 비추는 CCTV를 결코 용인할 수 없지 않은가?
구해근은 앞서 책에서 말한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지성적이고 진실하며 존엄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한국의 공장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이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했는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 시민들을 감시망에 가두고, 성실을 모욕하고, 자신들은 최소한의 사회적 감시와 민주적 통제마저 거부하는 조직들이 지배하는 세계. 그 무례한 세계에서도 성실한 이유? 우리가 사람이어서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