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여러 사람이 코끼리를 둘러싸고 고뇌에 빠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의 손으로 만져서 파악하기에는 코끼리가 너무 크다. 게다가 코끼리의 모양새는 꽤 독창적이다. 코끼리 코를 만지는 사람은 귀, 다리, 상아를 만지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코끼리를 경험한다. 만약 코끼리에 관해 전혀 모른 채 코를 만진다면, 나는 그걸 뱀처럼 길쭉한 생물의 몸통이라고 여길 터다. 그러다 입에 도달하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여기가 입이라면 내가 만졌던 부위는 대체 뭐지? 코끼리의 신체는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거지? 처음부터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의문에 빠질 일도 없다. 정보의 제약이 물음표를 부른다. 눈을 쓰지 않고 코끼리를 이해하려면 단서를 조합하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 추리의 시작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장님 코끼리’는 상당히 인기 있는 놀이다. 미스터리 작가들은 사건의 진상을 한 번에 공개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에 빈칸을 만든다. 범인은 누구인지, 배후의 정체는 무엇인지, 물건의 행방은 어떻게 됐는지 중요한 정보를 숨긴다. 추리의 목표는 빈칸을 채우는 것이다. 다만 목표 달성은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지연되어야 한다. 전후 사정이 모두 밝혀지면 추리는 끝난다. 그러니까 추리의 재미는 정답이 아니라, 정답의 부재에 있다. 혹은 츠베탄 토도로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답을 알지 못하고 있는 동안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코끼리의 모습을 한눈에 바로 확인할 수 있다면 재미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코끼리를 더듬더듬 만지며 그 모습을 궁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 놀이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동안에 제일 활기를 띤다.
장님 코끼리 놀이의 재미를 훌륭하게 활용하는 게임으로 ‘전지적 추리시점’이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모든 참가자는 각자 정보의 일부만 얻는다. 참가자들이 나눠 갖는 카드에는 추리의 단서가 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CCTV 화면이, 다른 사람에게는 도난당한 물건의 사진이 돌아가는 식이다. 받은 카드는 원칙적으로 혼자만 봐야 한다. 그러니까 다들 코끼리의 각기 다른 부위를 만져보는 셈이다. 자기가 목격한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도 경험시킬 수는 없다. 그 대신 참가자들은 자기가 본 그림의 내용을 자유롭게 설명한다. ‘내 카드에는 석상의 성분 분석 결과가 있었어’ ‘내 카드에 나온 CCTV는 6번이던데, 그럼 이게 살인사건 직전에 피해자가 찍힌 영상인가 봐’ 등이다. 이렇게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함께 토론하고 추리하는 과정이 ‘전지적 추리시점’ 게임의 핵심이다. 정답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는 번거롭고 비효율적이다. 추리의 재미로 향하는 방법으로는 정석적이라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
속담으로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일부분만 아는데도 전부 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이런 맹인모상(盲人摸象)의 기원이 되는 일화에서 6명의 ‘장님’은 서로 자기가 만진 부위의 형태가 진짜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반면 위와 같은 게임 참가자들은 코끼리의 모습을 파악하기에는 자신에게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어쩌면 맹인모상의 ‘장님’들에게도 게임이 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추리의 재미를 알게 됐을 텐데.
심완선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