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국회 청문회에서 사망 노동자의 가족들이 쿠팡에 대해 책임을 물으며 분노와 눈물로 절규하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자본은 왜 이토록 비정한가. 수천만 건의 개인정보를 유출하고, 각종 비리가 들통나자 정부도 이제야 나서고 있다. 영업을 취소하고 기업가들을 감옥에 보낸다고 달라질까. 자본주의 시스템에 근본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착취당한 노동자들이 빈곤과 파멸에 처할 것이라고 예언한 마르크스의 말이 다 맞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예의 없음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쿠팡의 잘못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소비자의 신뢰를 배반했다. 플랫폼 기업엔 사회가 축적한 신뢰가 원자본이다. 대중은 개인정보를 의심 없이 주었으며, 쿠팡은 국민의 혈세로 만든 정보고속도로를 이용해 이윤을 챙겼다. 소비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둘째는 수요와 공급의 틈새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기계 취급해왔다. 노동의 리듬을 인간에게 맞추지 않고 수학적 알고리즘에 맞춰 노동자의 삶을 파괴했다. 대중의 욕구를 돈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도구에 불과했다.
애덤 스미스는 인류의 발명품인 자본주의에 윤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이 부를 추구하는 동기는 소유욕보다는 주목을 받고 공감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라고 했다. 또한 <국부론>에서는 내면의 인간이자 공정한 관찰자인 양심을 통해 이기심이 균형을 이룬 ‘보이지 않는 손’이 적절한 시장 가격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물적 본능은 시장의 자율성과 공정한 경쟁을 능가했으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상품으로부터도 소외당했다.
세계는 중상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약육강식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이행하며 자본의 고삐를 풀어왔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경원시하던 때도 있었고, 손으로 돈을 만지는 것을 혐오하던 때도 있었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비합리적인 충동을 억제하며 합리적이고 절제된 경제활동이라고 보았다. 종교개혁으로 근면과 절제, 직업의 소명의식이 자본축적과 투자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했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러나 결국 그가 경계했던 최후의 인간인 “정신 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욕망은 이성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2006년 일본의 라이브도어 사건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주가조작과 분식회계로 50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젊은 벤처기업가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자살’이라고 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실형 판결을 받은 호리에 다카후미 회장은 <100억 버는 일의 기술> 등 돈에 관한 책들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썼다. 벤처신화의 주인공, 시대의 총아로 알려지며 연예인으로서도 인기를 누렸다. 쿠팡 사건은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물신에 대한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충실해졌다.
과연 허망한 믿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을까. 먼저 시야를 넓혀 광활한 우주의 나이에 비해 인간은 찰나에 불과한 존재라는 한계 상황을 느껴야 한다. 나아가 모든 존재는 근원을 무엇으로 명명하든 그것에 뿌리박은 하나의 세계에 속한 동포(同胞)임을 자각해야 한다. 하여 유일한 생명체의 낙원인 지구에서 인간과 그 존엄성은 손상될 수 없는 최고의 자본이자 절대적 자본이다.
그리고 스미스가 말한 도덕 감정을 더욱 확장시켜야 한다. 도덕은 타인에 대한 경외감만이 아니라 우주를 둘러싼 무한자의 품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마음이다.
<도덕경>에서 도는 만물의 본체이자 우주의 모든 법칙을, 덕은 도가 순환하면서 드러낸 자연계의 모든 살림을 말한다. 슬기로운 자들은 하늘의 도를 깨달아 자비 가득한 덕을 구현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도덕을 구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하늘의 은혜인 보이지 않는 손길이 충만한 인간적 자본주의가 부디 이 땅에서 구현되는 한 해가 되길 희망한다.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